KBS1 TV의 주말 대하사극 ‘정도전’의 인기가 높다. 사극 마니아층인 중장년 남성 시청자들의 반응이 뜨겁다. 중견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과 역사왜곡이 없는 충실한 고증이 돋보인다.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인 작가의 이야기 전개도 속도감과 짜임새가 있다. 이 사극은 고려 공민왕 시해 직전인 1374년부터 정도전이 살해당한 1398년까지 여말선초 24년간을 정도전의 시각에서 다룬다.
같은 방송이 18년 전 방영한 ‘용의 눈물’은 최고의 대하사극 중 하나로 꼽힌다. 1997년 대선을 앞둔 시기에 시청률이 49%까지 치솟았던 이 사극 역시 여말선초를 다뤘다. 이방원의 왕권(王權)과 정도전의 신권(臣權)이 충돌하는 과정을 당시 대선정국의 화두였던 내각제합의와 절묘하게 연결시켰다. 비정한 권력투쟁 과정을 ‘부자(父子)간에도 권력은 나누지 못한다’고 압축한 말은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동시대를 다룬 두 정치사극의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이성계가 1388년 위화도 회군(回軍)을 하는 장면부터 시작하는 ‘용의 눈물’은 상층부의 권력투쟁에 초점을 맞췄다. 반면 ‘정도전’은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재상 정도전을 조명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 사극은 썩고 병든 고려말기의 시대상을 파고들면서 민생을 뒷전으로 한 우리의 현실정치도 은근히 꼬집는다.
정도전은 고려 조정의 친원(親元)정책을 비판했다가 유배를 당한다. 민초들의 처참한 삶을 목격하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울분을 토한다. 이성계를 도와 1392년 조선왕조를 창업한 그는 민본(民本)정치라는 새 왕조의 이념과 시스템을 도맡아 설계한다. 1398년 여름 ‘1차 왕자의 난’ 때 대역죄인으로 몰려 참살당한 그의 복권(復權)은 500년이 지난 고종 때 이뤄진다.
‘용의 눈물’은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운 정도전을 사료 고증을 통해 조명한 첫 번째 사극이다. 태조실록에는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걸하다 참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 극은 절명시 자조(自嘲)를 남기고 숨을 거둔 그의 최후를 비장하게 그렸다. 이환경 작가는 “조선을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파란만장하게 일생을 산 사람이 비굴하게 죽었을 리 없다”고 술회했다.
‘정도전’은 여러 사극에서 역적·간신 등 부정적으로 그려진 정도전 복권의 완결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회견에서 퇴근 후에도 보고서를 읽느라 여념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한숨 돌릴 수 있는 주말에는 ‘정도전’을 보면서 역사와 대화하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600년 전 정도전이 꿈꾸던 민본의 세상은 지금도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과제다.
박 대통령은 대선 출마 때 “50년 이상 지속할 수 있는 국민행복의 초석을 마련하겠다”고 다짐했다. ‘통일은 대박’이라며 한반도 통일 논의의 불씨도 제대로 지폈다. 그러나 대통령 혼자 뛰는 ‘나홀로 리더십’만으론 성공하기 힘든 난제들이다. 자리를 걸고 직언할 줄 아는 올곧고 유능한 관료들의 동참이 절실하다. 이들이 주체적으로 국정을 이끌고 국민들의 참여도 끌어내야 실천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책임총리제의 실종과 장관들의 존재감 부족은 아쉬운 대목이다.
조선왕조는 세계사에서도 드물게 단일왕조로 519년의 역사를 이어갔다. 정도전이 기틀을 마련한 민본정치의 이념과 군주와 재상의 협치 시스템이야말로 왕조를 지탱한 밑바탕이었다. 여말선초와 지금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순 없지만 난세(亂世)라는 점에선 닮은 면도 있다. 조선왕조를 설계한 정도전의 고뇌와 좌절, 꿈과 실천을 담은 정통사극을 보면서 성공한 대통령이 되는 길을 헤쳐 나가길 바란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