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게릴라 같았다. 2012년 8월의 더운 여름날, 아침에는 부산 기장군 함박산을 오르며 수색하다가 오후에는 부산 번화가인 서면에서 전단을 돌렸다.
울산의 한 퓨전중국집 사장이었던 50대 박대영 씨(가명)가 게릴라처럼 변한 건 집에서 두 딸이 살해됐기 때문이었다. 범인은 큰딸이 한때 사귀었던 김홍일이었다. 범행 후 달아나는 모습이 폐쇄회로(CC)TV에 잡혔다.
범인은 사건 3일 뒤 자신이 다녔던 부산의 한 대학 뒷산에서 발견된 뒤 종적을 감췄다. 박 씨는 직접 나서기로 했다. 김홍일의 얼굴이 담긴 전단을 부산 시내 곳곳에서 시민들에게 나눠주거나 붙였다. 이어 박 씨는 인근 산을 이 잡듯 뒤졌다. 산속에 숨어있을 가능성이 있는 김홍일을 찾기 위해서였다.
박 씨의 일정을 기자가 하루만 쫓아다녔는데도 파김치가 될 정도였지만 그는 이렇게 하지 않고는 딸들의 얼굴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그의 눈에는 범인에 대한 분노와 범인을 잡겠다는 의지와 함께 딸을 잃은 슬픔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박 씨는 살해 현장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처남 집에 임시로 살면서 가게도 문을 닫고 오직 범인 추적에만 나섰다. 결국 김홍일은 마지막 발견 지점에서 멀지 않은 송전탑 건설현장 인근에서 한 약초꾼의 눈에 띄어 55일 만에 체포됐다. 김홍일은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매년 국내에서 발생하는 살인사건은 1000여 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들의 정신적 충격과 트라우마는 박 씨의 경우처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이것이 심해져 우울증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발전하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심지어 자살에까지 이른다.
2004년 유영철에게 큰형이 살해당한 사실이 알려진 뒤 그 4형제 중 둘째와 막내가 차례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나마 남은 셋째마저 사회와 고립돼 살고 있다.
직장이나 사업을 그만둬 경제적으로도 추락하거나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경우도 흔하다.
때마침 15일 ‘한국살인피해자 추모위원회’ 설립을 위한 준비모임이 있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음 달 15일 전국 17개 위원회 지부와 함께 정식으로 문을 연다. 유가족을 위한 심리치료, 경제적 자립을 돕는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추모 사이트도 개설해 피해자 가족끼리 서로 아픔을 나누도록 했다. 그러나 민간단체에만 맡겨놓을 일이 아니다. 성폭력의 경우 특별법이 제정돼 형량도 강화되고 피해자 보호 장치도 많이 마련됐다. 특히 범죄피해 구조금 600억 원 가운데 여성가족부가 50%를 관리하게 되면서 성폭력 등 여성 범죄나 아동 범죄의 피해 구조에 쓸 수 있게 됐다.
성폭력만큼이나 가족을 잃은 슬픔을 겪는 살인 피해 유가족에게도 보호 및 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 유족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초기 수사 과정에서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수사상황을 알려주지 않는 것, 경제적 어려움을 완화할 구조금이 쥐꼬리만큼 지급되는 것도 모자라 늦게 나오는 것, 향후 정신적 스트레스에 대한 지속적 치료 대책이 없는 것 등 크게 3중고를 겪는다고 한다.
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2008년 기준으로 범죄 피해로 인한 비용의 96%를 민간이 부담한다는 통계도 최근 나왔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에게만 복지를 해준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평생 한 번 겪기 힘든 충격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살인 피해자 유가족을 돌보는 것도 진정한 복지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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