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운3 기7’ 쇼트트랙의 영광과 재앙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0일 03시 00분


성적 부진과 안현수 쇼크에 분노 표출할 희생양 찾기… 공과를 균형 있게 봐야
쇼트트랙 빙판의 무수한 복병… 불운 피하는 부적 지닌 선수도
분위기 반전시킨 女계주 3000m… 김연아의 금메달 방어전은 소치 올림픽의 백미

황호택 논설주간 채널A 시사프로 ‘논설주간의 세상보기’ 진행
황호택 논설주간 채널A 시사프로 ‘논설주간의 세상보기’ 진행
소치 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계주 3000m의 역전극은 눈물과 감동의 드라마였다. 부진한 성적과 안현수 쇼크로 침울하던 분위기를 일거에 반전시켰다.

쇼트트랙을 흔히 인생에 비유한다. 예측할 수 없는 비극이 닥쳐오면 인생은 속수무책이다. 그러나 운명적 요소라는 관점만을 놓고 보면 그래도 인생은 쇼트트랙에 비해 땀 흘린 대가를 공정하게 평가받는 편이다. 정말 인생이 쇼트트랙이라면 차가운 빙판 위에 널브러져 눈물을 쏟는 사람들로 세상은 가득 찰 것이다.

쇼트트랙 1000m에서 금메달을 딴 안현수는 “운은 연습에 대한 보상”이라고 말했다지만 그것도 금메달을 땄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소치에서는 수많은 금메달 후보가 단지 불운 때문에 볼링의 핀처럼 빙판에 넘어져 4년의 기다림이 물거품이 된다. 모든 스포츠에는 운이 작용하지만 유독 쇼트트랙이 심한 편이다. 111.12m의 타원형 얼음판을 도는 쇼트트랙에서는 너무 자주 출몰하는 불운(不運)의 복병을 만나지 않아야 승자가 될 수 있다.

안현수는 1000m에서 1분25초325를 기록했으니 평균시속으로 따지면 42.2km 속도다. 칼날 같은 스케이트에 몸을 싣고 아홉 바퀴를 돌면서 선수들은 한껏 과속 페달을 밟는다. 연쇄충돌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한순간이다. 뉴욕타임스는 쇼트트랙의 이런 운명적 측면을 다룬 최근 기사에 ‘멍청한 행운과 기술이 결혼한 스포츠’라는 제목을 달았다.

박승희를 보면 쇼트트랙에서 운이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알 수 있다. 쇼트트랙 여자 500m 결선 경기에서 박승희가 첫 반 바퀴를 돌고 코너로 접어들 때 영국의 엘리스 크리스티가 이탈리아의 아리아나 폰타나와 엉켜 넘어졌다. 이 바람에 박승희는 균형을 잃고 쓰러지면서 맨 뒤에 있던 중국의 리젠러우가 앞으로 나갔다. 박승희는 일어나 달리려다 다시 고꾸라지면서 4위로 골인했다. 그러나 심판 판정에서 크리스티가 실격하고 박승희는 동메달을 따냈다. 금메달을 딴 리젠러우는 우승 후보로 거론되지도 않던 선수였다. 이러다 보니 행운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고 독특한 미신에 집착하는 쇼트트랙 선수들도 있다.

안현수는 2006년 토리노에서 금메달 3개, 동메달 1개를 거머쥔 세계 정상의 선수였다. 모든 나라가 쇼트트랙에서는 짬짜미(순위 담합) 작전을 쓴다. 안현수는 상당 기간 이 작전의 수혜자였다. 쇼트트랙은 기량이 기본이고 운도 크게 작용하는 ‘운삼기칠(運三技七)’의 경기다. 그를 보호하기 위해 뒤에서 인간 방어벽을 쳐주는 역을 맡은 선수들은 “나도 행운의 여신과 키스를 하면 금메달을 딸 수도 있는데…”라며 억울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멍청한 운명의 여신은 한 사람한테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안현수는 2008년 1월 국가대표팀 훈련 도중 무릎을 다쳐 1년 동안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가지 못했다. 부상 후유증은 2010년까지 갔다. 2011년 4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6위를 해 탈락한 그의 러시아행은 적중했다.

한국 선수들의 성적이 상대적으로 부진하고 안 선수의 활약이 돋보이면서 안 선수의 아버지 안기원 씨의 입만 바라보는 형국이다. 기원 씨는 “성남시청 쇼트트랙팀이 해체되기 전에 러시아 귀화를 결심했다”며 지방선거를 앞두고 위기에 처한 이재명 성남시장을 구원해줬다. 그러나 한국체육대 교수이자 빙상경기연맹 부회장인 전모 씨에 대해서는 날을 세웠다. 전 교수는 안 선수를 발탁해 키운 사람이고 신기술 개발 등 그의 공헌을 높이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공과(功過)를 균형 있게 봐야 한다. 기원 씨는 ‘이렇게 보상받았으니까 아빠도 좀 편하게 지켜보시라’는 안 선수의 문자를 받고 태도가 다소 누그러졌다고 한다.

러시아로 가서 기회를 잡은 안현수를 둘러싸고 철부지들이 쓴 온갖 인터넷 공상소설이 판을 친다. 좌절했을 때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아 헤매는 전형적인 희생양 만들기다. 한국은 러시아보다 쇼트트랙 자원이 풍부했고, 2011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6위를 한 안현수에게 달리 특혜를 줄 도리도 없었을 것이다.

소치의 관전법에서 안현수나 메달 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김연아가 러시아의 텃세에 맞서 과연 피겨스케이팅 올림픽 금메달을 방어할 수 있을지다. 김연아의 두 번째 올림픽이자 마지막 올림픽을 쿨하게 즐기며 성원하자.

황호택 논설주간 채널A 시사프로 ‘논설주간의 세상보기’ 진행 hthwang@donga.com
#소치 올림픽#쇼트트랙 여자 계주 3000m#안현수#금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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