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와 2010년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를 치른 호텔. 2012년에는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려 50개국 정상이 찾았다. 매년 12만여 명이 이 호텔에 묵고 그중 10만 명이 해외 비즈니스맨들이다. 지금도 연간 1000억 원대의 매출을 기록하는 이곳은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다. 이 호텔은 GS건설 계열사인 파르나스호텔㈜이 운영한다. 김연선 파르나스호텔㈜ 상무(54)가 실질적인 ‘지휘자’다. 그는 지난해 10월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의 총지배인이 됐다. 이 호텔에서 한국인이, 그것도 여자가 총지배인이 된 건 호텔 문을 연 지 25년 만에 처음이다.
김 상무는 한마디로 자신의 성공에 대해 “꿈같은 일”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높고 화려한 자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어릴 때에는 이름 대신 언년이(계집아이라는 속어)로 불렸을 정도였다. “가난했고 배운 것도 없었다”는 그녀가 서울을 대표하는 호텔의 총지배인이 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소설감이라 여겨질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그녀가 태어난 달은 5월이었다. 하지만 동네 훈장이었던 할아버지는 손녀의 출생신고를 한없이 미뤘다. 그의 친정어머니가 애원을 해도 “계집애를 무슨…”이라며 매몰차게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7개월이 흘렀다. 해가 막 바뀌려는 찰나인 12월 23일. 할아버지도 더이상 해를 넘기기가 그랬는지 그제야 호적에 손녀딸 이름을 올렸다. 12월 23일이 김 상무의 공식 생일이 된 사연이다.
그 시절 딸들이라면 엄마를 대신해 새벽 밥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밤낮으로 삯바느질을 하는 엄마를 도와 제 앞가림도 하지 못하던 일곱 살 때부터 연탄불에 밥을 짓기 시작했다.
나를 키운 힘은 8할이 ‘결핍’
아들들 공부시키기도 빠듯한 형편이었다. 중3 때는 학급 반장까지 맡았지만 아버지는 “계집애가 무슨 공부냐”고 반대했다. 엄마가 고집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고등학교에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고교를 마치고 대학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가난한 형편에 대학은 언감생심. 아버지는 취직을 하라고 했다. 그녀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대학 예비고사를 치렀다. 그리고 전액 장학금을 준다는 2년제 전문대 전자계산학과를 택했다. 장학금을 받았으니 대학 진학을 반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첫마디는 이랬다. “차비며 밥값은 돈 아니냐?” 그녀는 주말도 없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 학교를 마쳤다. 하지만 허전했다. 배움에 대한 갈망으로 여전히 목이 말랐다.
어른이 될 때까지만 해도 ‘결핍의 유년기’는 늘 잊고 싶은 과거였다. 하지만 어느샌가 그때의 경험이 자신을 채찍질한다는 것을 느꼈다. 현실을 탓하지 않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신념이 생겼다.
그는 영어를 선택했다. 학원에 다닐 형편이 되지 않아도 주한미군 방송을 들으면 되지 않는가. 취업도 수월할 것이라 생각했다. 밤낮으로 공부했다. 마침내 작은 결실을 맺었다. 여행사와 무역회사를 다니다 나중에는 미8군 내 교육센터에서 일하게 됐다. 1980년대만 해도 부러움을 받던 직장이었다.
호텔에서 평생직장을 꿈꾸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서울 시내에 대형 호텔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대기업이 운영한다는 매력에 끌려 인터컨티넨탈호텔 공채에 원서를 들이밀었다. 열심히 공부했던 영어가 큰 도움이 됐다. 면접관들은 그녀의 영어 실력을 인정하며 GRO(Guest Relations Office)로 가서 일해 볼 생각이 없는지 물었다. GRO는 VIP 고객을 전담하는 부서로 ‘호텔의 꽃’으로 불리는 곳이지만 그때는 몰랐다.
“GRO를 ‘지하(地下)로’로 들었어요. 순간 내가 영어를 잘하는데 지하에서 일할 이유가 있나 하는 생각에 면접관에게 강하게 얘기했죠. 프런트데스크로 가고 싶습니다. 하하하.”
결국 그는 프런트로 배치됐다. 나이 스물여덟. 호텔리어로서의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일은 쉽지 않았다. 하루에 8, 9시간을 서 있어야 했다. 체크인 고객들을 응대하고 체크아웃 정산을 했다. 동료 18명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았고 유일하게 호텔 근무 경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힘들다고 징징거리지도 않았고, 1원의 계산도 틀리지 않았다. 삿대질을 하는 손님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도 없었다. 몇 달 후 상사가 “너처럼 독한 애는 처음 봤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3년 뒤 그는 객실부장 비서로 발령받았다. GRO에서 매니저(주임)가 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엔 실망했다. 하지만 이내 기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객실부장은 로비와 프런트, GRO 등을 총괄하고 예산까지 관리하는 직책이었다. 그 밑에 있으니 호텔 업무 전반을 배울 수 있었다. VIP 전용공간인 클럽라운지를 직접 기획하는 행운까지 누렸다. 이어 입사 6년 만에 클럽라운지를 담당하는 GRO 매니저가 됐다.
“클럽라운지를 만들 때 정말 열심히 했어요. 구두 굽을 매일 새로 갈아야 할 정도로 뛰어다녔으니까요. 새 카펫, 새 가구 때문에 알레르기가 생겨 얼굴에 화장도 못할 정도로 피부가 나빠졌어요. 그래도 신이 났어요.”
승진 누락으로 겪은 슬럼프
‘영원한 에너자이저’일 것 같은 그녀에게도 슬럼프가 왔다. 입사 10년 차, 대리 승진에서 미끄러진 직후였다. 주위에서는 “될 거다”란 말을 해주었는데 막상 인사 뚜껑이 열리고 나니 남자 동료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상실감은 컸다. 전문대 졸이라는 학벌 탓일까, 아니면 여자인 탓일까. 이런 상황이라면 미래가 없는 것 아닌가,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나…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나 쉴 새 없이 달려온 인생의 전환기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포기 대신 ‘공부’였다. 그녀는 초심으로 돌아갔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으며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국내 대학원에서 호텔경영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999년엔 교육 매니저 발령을 받았다. 그녀가 일하고 있던 그랜드 인터컨티넨탈(테헤란로) 인근에 새로 문을 여는 인터컨티넨탈 코엑스(봉은사로)의 신입사원을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신입 직원 300명을 6명씩 그룹으로 나눠 서비스 교육을 시키는 데 두 달 만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탈진이 됐다.
열정은 확실히 보상받기 마련인가.
2004년 마침내 그는 인터컨티넨탈 코엑스의 객실팀장이 됐다. 국내 특급호텔에서 여성이 객실 총책임자가 된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영국 인터컨티넨탈호텔스그룹(IHG)이 운영권을 갖고 있어 주요 보직은 모두 외국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호텔경영학 박사학위도 그 무렵 땄다.
병마 이기고 현장 최고책임자로
긍정에너지로 앞만 보고 달려온 그녀에게도 위기가 닥쳤다. 2006년 유방암 1기 진단을 받은 것.
“멍했죠. 울진 않았어요. 전 잘 안 울거든요.”
그녀는 수술대에 오르면서도 “예쁘게 꿰매 달라”고 농을 던졌다고 한다. 하지만 항암치료 기간이 길어지면서 긍정 에너지도 바닥을 보였다.
“서너 달이면 복귀할 줄 알았는데, 회복이 생각보다 더뎠어요. 자리를 오래 비우는 부담이 커져서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죠.”
하지만 회사는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그녀가 병을 완치하고 돌아오자 코엑스점보다 규모가 큰 그랜드점 객실팀장을 맡겼다. 그리고 5년 뒤인 2013년 10월 ‘최초의 한국인 총지배인’이자 여성 1호 총지배인이 됐다.
“총지배인은 객실·식음·조리를 모두 통솔하는 현장의 최고 지휘자라고 할 수 있지요. 신입 직원 한 명 한 명을 제 손으로 키웠는데 이제 이들과 함께 호텔 전 직원 500여 명이 혼연일체가 돼 ‘집처럼 편안한 호텔’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겁니다.”
가난과 여성이라는 차별, 거기에 병마까지 이겨낸 그녀와의 인터뷰는 시종일관 유쾌했다. 그것은 어느 한 분야에서 한눈팔지 않고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여유처럼 보였다.
▽약력
― 1988년 호텔 인터컨티넨탈 서울 입사 ― 1994년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GRO 매니저 ― 1999년 인터컨티넨탈 코엑스 서울 교육 매니저 ― 2004년 인터컨티넨탈 코엑스 서울 객실팀장 ― 2005년 경기대 호텔경영학 박사 졸업 ― 2008년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객실팀장 ― 2013년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 총지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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