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북한의 한 농촌에 미국에서 성공한 한국인 사업가가 고향 방문을 오게 됐다. 마을에선 제일 좋은 집을 내주고 좋은 가구와 가전제품들을 채워 넣었다. 사업가가 오자 북에 살던 어머니와 형제들은 “수령님 품속에서 이렇게 좋은 집에서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이별의 순간이 오자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어머니가 불쑥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우린 네가 차라리 죽은 게 나았다.”
사업가는 인민군 포로 출신이었다. 포로 교환 때 북에 돌아가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를 몰랐던 북한은 그를 전사자로 처리했다. 인민군 전사자 가족은 국가유공자 대우를 받아 대학도 쉽게 가고 간부 승진도 빠르다. 그래서 북에선 출신성분을 따질 때 항일빨치산 가족을 의미하는 ‘백두산줄기’ 다음으로 6·25전쟁 전사자나 참전자 가족을 일컫는 ‘낙동강 줄기’를 꼽는다.
그런데 사업가의 북한 동생들은 형이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졸지에 ‘혁명열사 형제’에서 ‘반역자 형제’로 신세가 바뀌었던 것이다. 인민군은 “포로가 되는 것이 최대의 수치”라고 교육받았는데 형이 포로가 된 것도 모자라 철천지원수인 미국에 가서 사업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네가 차라리 죽은 게 나았다”는 어머니의 말은 “너 때문에 이제 네 동생들은 물론이고 조카들까지 망했다”는 뜻이었다.
어머니의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사업가 아들은 미국으로 돌아간 뒤 연락을 끊었다. 실제로 형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졸지에 파면을 당한 형제들은 두고두고 푸념을 했다. “이렇게 된 바엔 돈이라도 보내주지.” 그러나 미국에 있다는 형에게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몇 년 전, 1953년 포로 송환 때 인민군 포로들이 한국에서 준 옷을 벗어던지고 팬티 바람으로 북으로 돌아가며 “공화국 만세”를 외치는 기록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공화국이 자기들에게 어떤 가혹한 운명을 안겨줄지 몰랐다. 이들은 ‘귀환병’이란 딱지를 안고 탄광과 제철소 같은 가장 힘든 곳에 보내져 전향 혐의자로 평생 감시 속에 생을 마쳤다. 귀환병 자녀들은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삶을 대물림했다.
북한에선 전사자와 포로를 대하는 태도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1960년대 후반 출신성분 조사를 시작할 때 북한은 전쟁 중 인민군 행방불명자 대다수를 전사자로 인정했다. 초기에 참전해 거의 궤멸된 인민군은 죽었는지 잡혔는지 입증해줄 사람조차 없었다.
이달 20일 열린 1차 이산가족 상봉에는 인민군 포로 출신의 남쪽 상봉자가 2명 포함됐다. 그들의 북한 아들과 형제들은 지금까지는 전사자 가족으로 처리돼 국가의 우대를 받았다고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22일 보도했다. 하지만 전사자인 줄 알았던 아버지와 형님이 남쪽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과연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렇다고 내놓고 “이제 배신자 가족으로 어떻게 사느냐”는 푸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도청기가 설치된 곳이니 앞으로 닥칠 삶에 대한 걱정 대신 “수령님의 보살핌 속에 행복하게 산다”는 말만 되풀이해야 했을 것이다. 실제로 남쪽 이산가족들 중에는 “내가 북한 입장에선 반동인데 내 존재가 알려지면 혈육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중국을 통해 몰래 혈육을 찾아 나선 사람들도 적지 않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넘었으니 고령이 된 북한의 혈육 성분 따윈 개의치 않을 수도 있다. 전사자 가족에게 주는 혜택도 2대부터는 별로 없다. 차라리 요즘에는 자녀들에게 남쪽 혈육을 이어주어 나중에라도 도움 받을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남쪽에 자발적으로 남은 인민군 포로가 있다면 북쪽엔 강제로 남겨진 국군포로가 500여 명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80여 명의 국군포로가 남쪽으로 귀환했다. 이들 대다수는 브로커들이 몰래 빼오는 방식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브로커들은 한국에 가면 엄청난 보상금이 기다리며 나중에 북한 가족도 빼오면 된다고 회유한다. 죽기 전 고향땅을 밟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적잖은 국군포로들은 고령의 몸으로 두만강을 건넜고, 가족을 빼온 경우도 많다. 하지만 요즘은 북한의 집중 감시로 가족까지 데려오기가 여의치 않다. 홀로 남쪽에 와도 평생을 함께 산 가족을 남겨두고 왔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니 몇 년 안 남은 여생이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군포로는 한국 정부가 최우선적으로 해결을 원하는 사안이다. 북한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남았다고 주장하면서 적극적으로 해결할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명분에 집착해 실리를 잃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에는 철저히 실리적으로 접근한다. 남쪽의 대북지원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지속됐을 리 만무하다. 이번 역시 남쪽에 ‘배려’를 해줬다고 여기고 대가를 생각할 것이다. 그런 북한이 정작 국군포로가 갖는 파급력은 놓치고 있다.
만약 국군포로 고향방문단을 만들어 남쪽에 보낸다면 한국의 민심이 어떻게 달라질지 북한은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어차피 남쪽 사람들은 그들이 아오지 탄광에서 학대당했음을 다 안다. 방문 후 북한 가족에게 돌아갈 국군포로들은 말도 조심스럽게 할 것이다. 이제 삶이 별로 남지 않은 80대 후반의 국군포로들이 남쪽 고향에 와서 며칠 지내고 가는 것이 뭐가 두렵단 말인가. 남쪽에서 북한과 등 돌리고 살자는 여론이 커지는 현실을 감안할 때 북한으로선 혈육의 정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실리적인 전략이다.
개인적으론 2000년 9월에 대다수가 남파간첩인 비전향장기수 63명을 대가 없이 북송한 것을 대북정책의 가장 큰 잘못 중 하나로 생각한다. 그것이 그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만드는 데 기여했는지는 몰라도 사실 남한은 장기수 북송을 북한이 국군포로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만드는 카드로 활용할 수 있었다. 남쪽은 그 좋은 빅 카드를 그냥 버렸다.
북한은 남한이 범한 그런 우(愚)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남쪽과의 협상에서 국군포로라는 빅 카드가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다만 유효기간은 몇 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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