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길수 신당’과 새누리당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4일 21시 10분


정당 신장개업의 명수 김한길, 명랑다방을 해피커피숍으로
안철수 새정치연합 확정 14일만에 새정치-헌정치연합으로 기성품化
‘정치 운동장’ 다시 평평해졌다… 대통령 지지율은 여당의 신기루
민심은 安住를 용서하지 않는다

배인준 주필
배인준 주필
이번에는 ‘길수 민주당’이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낡은 수법이지만 한 건 했다. 안철수 의원은 ‘새 정치, 헌 정치’ 가릴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안 의원은 새정치연합, 영어로 New Political Vision Party라는 당명을 확정(2월 16일)한 지 딱 14일 만(3월 2일)에 새정치·헌정치연합에 합의했다. 김 대표는 올림픽으로 치면 메달감이다. 그는 당을 지지도 최악의 수렁에서 건져 올릴 밧줄을 거머쥐었다. 안 의원의 정치 호적(戶籍)을 슬쩍 바꿔낸 김 대표의 솜씨는 고수라 할 만하다.

김한길이 누구인가. 소설가이고 방송진행자였다가 DJ가 대선 4수(修)를 위해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에 18년 전 영입되어 산전수전 다 겪었다. 그의 당적은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중도개혁통합신당→대통합민주신당→민주통합당→민주당을 거쳐 가칭 ‘길수 민주당’으로 탈바꿈할 참이다. 그 자신이 정당 신장개업에 관한 한 선수(選手) 중에 선수이다. 그에게 당 리모델링은 명랑다방을 해피커피숍으로 바꾸는 것보다 조금 어려운 정도일지 모르겠다.

새누리당은 ‘길수 야합(野合)’을 맹비난하지만 비판이 맞더라도 야권 때리기만으로 지방선거에서 이기기는 어렵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패색이 짙던 한나라당을 새누리당으로, 당 색깔을 파랑에서 빨강으로, 당 노선과 상징인물을 진한 보수(保守)에서 애매한 보수 또는 중도(中道)로 바꾼 것도 선거 계책이란 점에서 명랑다방을 해피커피숍으로 신장개업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다만 합당극을 벌이지 않은 것은 합당 방식으로 헤쳐모여 세(勢)를 불릴 필요가 적었기 때문이다.

2012년 새누리당은 ‘박근혜표’ 이미지 세탁 효과에다 친노(親盧)그룹 좌파 꼴통 행태의 반사효과로 총선 대선에서 이겼다. 그때 민주통합당이 친노 컬러가 아닌 김한길 같은 사람의 중도진보 노선과 온건한 선거 전략을 주류로 삼았더라면 총선 대선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뭐라고 포장하건 이제 ‘길수 민주당’의 한 축이 된 안철수 의원은 흔한 기성 한국 정치인이 된 것처럼 보인다. 2년 반 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계기로 그가 ‘새 정치’ 깃발을 한번 펄럭이자 타락한 기성정치에 질려 있던 민심이 쏠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콘텐츠 없는 ‘새 정치’로 청춘콘서트의 속편을 성공시키기에는 우리 국민이 녹록한 정치 소비자들이 아니다. 아이돌의 반짝 인기가 아무리 치솟아도 이미자 조용필 같은 국민가수는 하루아침에 못 나온다. ‘새 정치’ 구호는 새로울 것도 없다. DJ가 1992년 12월 대선 3수(修)에 실패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가 2년 7개월 뒤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만든 당도 ‘새정치’국민회의였다.

안 의원이 길지도 않은 2년 남짓에 숱한 허언(虛言)과 식언(食言), 변절 행보를 보이고 그럴 때마다 남 탓이나 하는 것은 이기는 길이 아니다. 남을 공격한다고 자신의 허물이 덮이지 않는다. 남 탓이 많을수록 자신의 새 인물 이미지가 헌 인물 이미지로 퇴색하고, 무능이 국민 뇌리에 각인되기 쉽다. 국민은 속는 척할지라도 날카롭게 인물값을 저울질한다.

안철수 현상이 거의 다 깨진 안철수 환상이 되었지만 ‘진정한 새 정치’에 대한 민심의 갈망은 식지 않았고, 지금도 안 의원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다. 기왕에 사실상의 민주당 사람이 되었으니, 민주당 일각의 질긴 반(反)대한민국 체질과 관행을 깨부수는 일에 도전해 보면 어떨까. 거기서 정치인 안철수의 진짜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그동안의 시행착오를 구제받을 수 있고, 허명(虛名)뿐이 아닌 차기 유망주로 떠오르지 않을까.

그는 “수영장에서 수영할 수 있으면 바다에서도 가능하다”고 했지만 턱도 없는 말임을 지금은 깨닫고 있을 것이다. 안 의원이 걸어온 길을 성공신화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뒤집어볼 수도 있다. 최고 의대를 나왔지만 의사로 대성하지 못했고, 컴퓨터바이러스사업 도전은 훌륭했지만 경영인 자리에서 도중하차했으며, 서울대 부부 교수로 각광받았지만 어느 전공분야에서도 큰 학자의 족적이 없다. 지금은 정치에서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 서 있다.

안철수 현상이라는 정치적 대융기(大隆起)는 잠시뿐이었고 정치 운동장은 다시 평평해졌다. 지난날의 박근혜 선거신화도 새누리당의 안전판이 못된다. 박 대통령 지지율은 새누리당에는 신기루일 가능성이 있다. 정당의 안주(安住)는 죄가 된다. 정치의 대마불사(大馬不死)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민심이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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