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란 게 뭐 별거 있나요. 빚 탕감해주거나 경기 살려서 일자리와 소득이 늘어나길 바라는 건데….”
최근 정부가 발표한 가계부채 대책이 3년 전 발표했던 것에서 숫자만 바꾼 ‘재탕’이란 비판이 제기되자 한 정부 관계자가 이런 전화를 걸어왔다. 가계부채가 1000조 원을 넘어서 대책을 내놓긴 했지만 박근혜 정부 첫해인 지난해 저소득층 부채 탕감을 해줬고, 경기활성화를 위해 ‘경제혁신 3개년 계획’까지 내놓은 상황에서 대출만기를 늘려주는 정도 외에 뾰족한 해법이 없다는 푸념이었다.
하지만 경제학적으로 보면 부채 문제에 확실히 먹히는 ‘마법탄환’이 하나 있다. 인플레이션, 즉 물가 상승이다. 물가가 올라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 화폐로 표시된 빚 부담은 줄어든다. 1980, 90년대에 대출을 받아 집을 산 사람이 많았어도 지금처럼 부채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던 건 부동산을 포함해 물가가 빠르게 올랐기 때문이었다.
요즘 한국의 물가는 디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안정돼 있다. 2월 중 소비자물가는 작년 같은 달보다 1.0% 오르는 데 그쳤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작년 10월에 0.9%까지 떨어졌다가 이후 4개월 연속 1%를 간신히 넘겼다. 한국은행의 물가 목표인 2.5∼3.5%에 한참 못 미친다. 상품·서비스의 가격 수준을 보여주는 생산자물가지수는 1월에 0.3% 하락하는 등 16개월 연속으로 떨어졌다.
물가 문제는 공공기관 ㅊ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최근 한국전력, 수자원공사, 철도공사(코레일), 도로공사 등은 전기, 수도, 철도, 고속도로 요금을 올려 각각 3000억∼2조 원 정도의 빚을 줄이겠다고 기획재정부에 보고했다가 퇴짜를 맞았다.
공공기관의 황당한 복리후생 관행은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전기요금에서 한전의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1.9%다. 한전 직원들 월급을 절반으로 깎아도 요금의 1%를 줄일 수 있을 뿐이어서 막대한 부채 감축에 별 도움이 안 된다. 이들 기관의 만성적자를 해결하려면 정치적 이유로 제때 올리지 못했던 요금을 언젠간 현실화할 수밖에 없다.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의 핵심 과제인 ‘서비스업 빅뱅’도 물가 문제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금융, 보건·의료, 교육, 관광 등 서비스 분야를 활성화하려면 ‘고(高)부가가치화’가 필수적이다. 고부가가치화는 고급화의 동의어다. 좀더 질 좋은 서비스에 훨씬 비싼 값을 치르는 고소득층이 있어야 서비스업을 통한 내수 활성화가 가능해진다.
제대로 오르지 않는 물가 때문에 여러 문제가 불거지고 있지만 한국의 경제정책에서 물가는 ‘죽은 카드’다. 이명박 대통령이 정권 말기에 물가잡기 총력전을 편 이후 현 정부에서도 그런 기조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은도 ‘물가안정’ 목표에만 매달려 재작년과 작년 초에 기준금리 인하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문제가 더 꼬였다.
물론 물가 상승이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려면 임금 상승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 상승이 억제돼 기업들이 제대로 돈을 못 벌면 근로자들의 임금 상승은 기대하기 어렵다.
박 대통령은 최근 “꿈까지 꿀 정도로 규제개혁을 생각하라”며 경제를 옥죄는 규제의 혁파를 강조하고 있다. ‘가격 규제’야말로 시장경제를 해치는 가장 강력한 규제다. 경기 활성화에 팔을 걷어붙이기로 했다면 물가 상승에 대한 과도한 피해강박은 버리는 게 좋다. 곧 취임할 이주열 한은 총재 후보자도 ‘물가 도그마’에서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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