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 올림픽이 끝났다. 올림픽 열기에 젖었던 국민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러시아 대표 안현수의 메달이 촉발한 체육계의 비리와 부조리에 대한 분노도 사그라지는 분위기이다. 선수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가 태릉선수촌에서 쫓겨났다던 코치들이 다시 올림픽 코치와 방송 해설자로 등장한 것에 격앙했던 국민들도 금메달 소식에 잠잠해져 버렸다. 대통령조차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넓고도 깊은 체육계의 부정부패가 그대로 잊힐 것인가. 우리 사회에 썩은 곳이 어디 체육계뿐이랴.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금메달을 따고 국민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어 주니 체육계가 정치권보다 낫지 않느냐. 메달이 가져다주는 순간의 기쁨에 취해 이런 식으로 고질의 부정부패가 무마될지 모른다.
2012년 마리오 몬티 이탈리아 총리는 “스포츠 정신에 어울리는 행동을 중시해야 할 프로축구계가 배신, 불법, 허위와 같은 진흙탕 속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몸서리쳤다”며 “2, 3년 동안 프로축구 경기를 전면 유예해야 한다”고 밝혔다. 2006년 세계를 뒤흔든 대규모 승부조작 사건에 이어 또다시 세리에 A 리그의 선수 등 수십 명이 검찰의 조사를 받은 데 따른 것이다. 축구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그러나 오죽 썩었으면 총리가 시합을 아예 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그랬을까.
총리의 발언에 축구계나 언론은 “축구는 국가 경제의 핵심이다. 정치인들의 부패가 드러난다고 해서 우리는 의회를 폐쇄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며 “총리의 애통함은 알겠으나 오지랖이 넓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마피아가 배후에 있다는 축구계의 부정부패는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2013년 6월 경찰은 40여 개 팀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고 회계 부정 등에 대한 전면 조사에 들어갔다. 승부조작이 터지면 그때만 흥분하고 어물쩍 넘어가는 축구계와 국민들의 관행이 부정부패가 반복되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그 결과는 세계 최고의 리그였던 세리에 A가 2류로 전락했다는 것.
미국 대학 스포츠는 160억 달러(약 17조 원) 규모의 산업이다. 프로 못지않다. 그러나 교육과 스포츠는 함께 가기 매우 어려운 것들임을 미국 대학 스포츠가 실증하고 있다. 채플힐 노스캐롤라이나대는 ‘공립 아이비’의 하나로 꼽히는 명문이면서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 여자 펠레 미아 햄 등을 배출한 스포츠 강자이다. 올 2월 캐럴 폴트 총장은 미 연방수사국(FBI)에서 비서실장과 법무담당관 등을 지낸 검사 출신 등 5명의 변호사에게 운동선수들을 둘러싼 학사부정에 대한 전면 조사를 의뢰했다(2012년 펜실베이니아주립대는 미식축구부 부정을 조사하기 위해 전 FBI 국장을 고용했다).
이 학교의 ‘흑인연구과’는 10여 년간 주로 미식축구와 농구 선수들을 상대로 200개의 ‘가짜 과목’을 개설했다. 전혀 수업이 없이 20쪽짜리 보고서만 내면 학점을 주는 과목. 이 과에서는 ‘독립 연구’라는 과목으로 선수들에게 별 과제 없이 학점을 제공했으며, 교수들의 서명을 위조해 성적도 바꿨다. 2011년 선수들의 학업 상담을 하던 한 직원의 폭로로 이런 문제가 밝혀지자 대학은 여러 개 위원회를 만들어 조사한 뒤 축구 감독을 파면하고 모든 운동부를 관장하는 체육위원회 위원장을 사퇴시켰다. 그리고 총장도 사표를 냈다. 그러나 2012년 학교는 전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에게 재조사를 요청했다. 2년여에 걸친 광범위한 조사 결과가 발표됐으나 계속 문제가 제기되자 새로 부임한 폴트 총장은 ‘특별검사’를 채용한 것이다.
운동선수들을 위한 대학의 학사부정과 스카우트 비리 등을 막기 위해 미국대학체육협의회(NCAA)는 한국에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자세하고도 까다로운 규정을 두고 있다. NCAA는 2009년 미식축구 선수들의 수업 과제물 등을 대필해 주었다는 이유로 플로리다주립대 축구 팀의 한 시즌 12승을 몰수하는 등 위반 대학에 강력한 처벌과 제재를 가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사고가 일어난다.
프로든 아마추어든, 이탈리아든 미국이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체육계의 부정부패는 사회의 여느 분야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미국의 대학들이 수년에 걸쳐 조사를 하고, 총장 등이 물러나고, 그것도 모자라 특검을 도입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체육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각급 학교에서 선수들이 수업에 아예 들어가지 않는 것은 학사부정 축에 끼지도 못한다. 그것이 밝혀졌다고 교장이나 총장이 물러나고 미국처럼 특검을 도입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지도자들이 선수를 패고 성폭행을 해도, 선배 선수들이 후배를 아무리 때려도, 지도자들이 학부모들로부터 돈을 받아 구속되어도 학교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데 말이다. 수업에 거의 나오지 않는 선수에게 학교 정신을 불어넣어 우승케 했다는 총장이 있고, 외국에서 계속 프로 생활을 한 선수가 졸업하고 공로상까지 받는 학교가 있는 한 스포츠의 부조리가 잡힐 수 없다.
“식도만 넘어가면 뜨거움을 잊는다”는 말이 있다. 소치 올림픽을 계기로 다시 불거진 체육계의 부정부패를 근절하자는 공감대가 쉽게 허물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학교와 체육단체의 처절한 반성과 함께 정부의 확고한 근절 의지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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