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박선희]요리하는 남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7일 03시 00분


박선희 소비자경제부 기자
박선희 소비자경제부 기자
중견기업 오너나 최고경영자(CEO)들이 주로 참석하는 대학원 인문학공부 모임에 나가던 회사원 A 씨는 최근 이들과 식사 자리를 가졌다가 깜짝 놀랐다. 시설이 갖춰진 곳에서 함께 나눠 먹을 스파게티, 스테이크 샐러드를 직접 요리하는 시간이었는데 40, 50대 ‘대표님’들이 너무나 능숙하게 면을 삶고 드레싱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유학 시절 요리한 경험이 있거나 고급 음식을 자주 접하며 자연스레 요리법에 관심이 높아진 고수들이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성들이 누리는 여유가 요리에 대한 조예로 발현된 경우였다.

여자들이 선망하는 남성상은 시대에 따라 변천을 겪어왔다. 한때는 터프한 육식남이, 한때는 섬세한 초식남이 인기였다. 나쁜 남자 스타일이 인기를 끈 적도 있다. 그렇다면 최근 버전은? 단연 요리하는 남자다. 요즘 사람들이 열광하는 요리 프로그램에 출연해 박력 있는 칼질을 선보이는 셰프들은 대부분 훈남이다. 꽃무늬 앞치마에 머릿수건을 쓴 요리연구가(대개는 중년 여성)가 중후한 말투로 양념장 제조법을 설명해선 누구의 이목도 끌기 어려워졌다. 드라마 남자 주인공들은 웬만한 레스토랑보다 나은 디너를 뚝딱 차려낸다.

요리하는 남자들이 여심을 사로잡은 이유는 뭘까. 일차적으로는 ‘남자가 요리를?’이라는 반전의 묘미가 시선을 끌었을 것이다. 제이미 올리버처럼 귀여운 표정의 남자가 몇십 분 만에 뚝딱 근사한 지중해식 생선 요리를 선보이는 것은, 어쨌든 신선한 충격이다. 남자들은 거침없이 자르고, 썰고, 볶고 끓인다. 여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요리의 세계에서 역동적이고 즉흥적인 남성미가 의외를 조화를 빚어내며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사실 요리할 줄 안다는 것은 경제력, 심미안과 감식안, 생활 방식 및 가치관과도 연결된다. 위에서 언급했듯 이른바 ‘잘나가는’ 남자들이 요리에 일가견이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내포한다. 먹고사는 게 팍팍해선 굳이 음식을 만들어먹는 호사를 누리기 어렵다. 몇천 원짜리 배달음식이 지천인 시대, 사먹는 것보다 제대로 해먹는 것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 비용이 들어간다는 걸 모두가 안다. 그럴듯한 음식을 만들 줄 안다는 것은 그런 문화를 지속적으로 누려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정환경도 짐작이 가능하다. 자상하게 요리하는 남자가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컸다고 상상하긴 어렵다. 요리 자체가 ‘괜찮은 남자’를 뜻하는 상징적인 스펙이 된 셈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식품회사들이 운영하는 요리 교실에는 남성 신청자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남성 대상 요리 강습의 경쟁률은 평균 5 대 1을 넘어선다. 짝을 찾는 싱글족에서부터 뒤늦게 요리의 가치를 깨달은 중년 남성들까지 다양하다. 데이트 때 맛집 잘 데려가는 남자가 여자에게 어필하던 시대가 있었다. 이젠 달라졌다. 끓일 줄 아는 건 라면밖에 없는 남자, 차려준 것만 군말 없이 잘 먹는 남자가 환영받긴 어려운 세상이 됐다.

박선희 소비자경제부 기자 teller@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