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풀리고 봄이 오는 듯하니, 나는 또 그리워졌다. 잃어버린 내 야상. 봄가을 내겐 교복과도 같은 옷이었다. 야상 스타일의 옷이 내게 꼭 그 한 벌뿐이었던 것도 아니고, 누가 봐도 칭찬할 만큼 멋진 옷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내 손은 자꾸 그 야상으로 향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적당함이랄까. 이미 몇 해를 입어 새 옷처럼 뻣뻣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낡고 해져 흐늘거리지도 않는 그 적당함. 그리 짙지도 옅지도 않은 색감이며, 그리 꽉 끼지도 넉넉하지도 않은 품 하며,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길이까지, 모든 것이 내게 적당했다. 동네 슈퍼에 갈 때도, 차를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갈 때도, 비행기를 타고 멀리 여행을 갈 때도. 그 야상에는 정말 ‘적당’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렸다.
그런데 잃어버렸다. 지난봄 여행지에서 늦잠을 자버린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국경을 넘어 나라를 옮겨야 했기에, 늦잠은 그 어느 때보다 나를 조급하게 했고, 그 조급함이 그만 숙소에 야상을 두고 나와 버리게 했던 것이다. 야상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이미 국경을 넘은 다음. 사실 그 야상의 적당함에는, 그리 비싼 옷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입고 아무렇게나 벗어놔도 된다는 것, 그러니 잃어버려도 별로 부담이 없다는 것 또한 포함돼 있어서, 나는 그저 조금 아쉬워하고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어쩐지 나는 슬퍼하고 있었다. 마치 사랑이라도 잃은 사람처럼 풀이 죽어 슬퍼하는 나, 그런 나를 위로하려던 일행. 이 기회에 새 옷 사자. 낡을 만큼 낡았던데, 한국 가면 내가 사줄게. 그런데 나는 그 말에 더 슬퍼지고 말았다. 없어, 그거랑 똑같은 옷은 없다고.
정말 없었다. 벌써 몇 해 전에 샀던 옷이라 똑같은 디자인의 야상은 당연히 없었고, 비슷한 디자인의 옷을 입어 봐도 이건 너무 끼는 듯하고, 저건 너무 요란하고. 이건 너무 무겁고, 저건 어쩐지 모르게 불편하고. 그 적당함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와 똑같은 야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으리라는 걸. 내가 찾는 옷은 새 옷이 아니라 ‘그 옷’이었으니까. 똑같은 디자인의 새 야상이 아니라, 몇 해를 입어 비로소 내게 적당해진 바로 ‘그 야상’이었으니까. 세월이 만들어준 그 적당함은 그 어떤 새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거니까. 그런데 시간이 흘러 다시 봄이 오는 듯하니, 나는 또 일감이 한가득 쌓인 책상에 앉아 일 대신, 검색을 하고 있었다. 똑같은 야상 어디 없나? 그와 똑같은 야상은 절대 찾을 수 없으리라는 걸 잃어버린 순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또.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 또, 찾고 있다니.
그런데 사실, 나는 그 또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또 찾으려 할 것이라는 것. 세월이 만들어준 그 적당함을 찾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면서, 아니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나는 늘 그랬으니까. 무언가가 가장 간절해지는 순간은 언제나, 그때였으니까. 이제 다시는, 그와 같은 것을 가질 수 없으리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사람이 가장 그리워지는 순간 또한 언제나, 그때였으니까. 이제 다시는,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으리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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