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의 출현은 한국 현대사에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32년 동안의 군사 정권을 마감하고 명실상부 민(民)이 중심이 된 민주 민간정부의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었다. ‘독재’라는 그늘이 있긴 했지만 한국 사회는 일사불란한 군인통치를 거치면서 가난하고 굶주린 나라에서 중진국 반열에 들어섰다.
그러나 정치적 전환점을 맞은 것과 동시에 양적 외형적 성장 위주의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터지기 시작했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무너져 32명이 죽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사과문을 준비하던 3일 뒤인 24일에는 충주호 유람선에 불이 나 29명이 숨졌다. 성수대교 붕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이듬해 1995년 4월에는 대구 지하철 공사 현장이 무너져 101명이 죽었으며 두 달 뒤인 6월에는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502명이 죽었다. 꼭 20년 전인 1994년 10월 로이터통신 서울 특파원은 ‘다리가 무너지고 유람선이 불타고 비행기는 떨어지고 기차가 충돌하는 한국에서는 나돌아 다니기가 겁이 난다’는 기사를 전 세계로 타전했다.
잇단 대형 참사는 우연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군(軍)과 관(官)이 행정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정경유착과 이에 대한 감시와 비판, 견제가 없는 폐쇄적인 사회문화적 환경이 낳은 후과(後果)였던 것이다. 과정에 대한 투명성이 결여된 채 결과와 속도만을 중시하며 달려오던 한국 사회가 치른 ‘성장통’이었다.
요즘 대한민국은 지난 20년 동안 숨 가쁜 양적 성장의 시대를 마감하고 질적으로 도약하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의 진입을 시도 중이다. 그 과정에서 ‘황우석 사태’의 의미는 결코 간단치 않다.
‘황우석 사태’는 꼭 10년 전인 2004년 2월 황 박사의 1번 줄기세포(NT-1)가 미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소개되면서 시작되었다. 황 박사는 산업적으로는 제조업 전자산업을 넘어 선진국형 중에서도 첨단 산업이라 할 수 있는 줄기세포 산업을 한국이 선두에서 이끌고 있다는 자부심을 안겨 주었으며 최초로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주었다. 그러나 곧이어 (2005년 말) 터진 논문조작 사건은 ‘과학계의 성수대교 붕괴’라 할만했다. ‘안전 관리 부실’에서 비롯된 성수대교 붕괴가 물질적 측면에서 한국인들에게 집단적 상처를 주었다면 ‘연구 관리 부실’에서 비롯된 황우석 사태는 정신적 측면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황우석 사태’는 그동안 우리 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온갖 부정적 요소들을 모두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이른바 주류 학문과 비주류 학문의 갈등, 영웅을 만들어놓고 무비판적 열광을 보내다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마녀사냥, 집단광기도 있었다.
‘황우석 10년’이 흐른 지금, 새삼 선진국을 만드는 진정한 시민 의식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그 시민의식이란 것은 한마디로 광기를 걷어낸 이성의 힘이 지배하는 사회 아닐까. 마치 프랑스 사회가 1894년 군사 기밀을 독일군에 팔아넘겼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받은 드레퓌스 대위를 마녀사냥 희생양으로 만들었다가 관용과 이성의 힘으로 구해낸 것처럼 말이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드레퓌스 사건 100년을 맞은 1994년 “불관용과 증오에 대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관용의 정신만이 프랑스 지식인 사회를 한 단계 성숙시킨다고 했다. 서양의 근대와 민주주의 확립은 광기와 분노가 지배하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사회’를 넘어 사랑과 관용을 바탕으로 한 이성의 힘을 믿고 전진한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성의 힘’ 바로 그것이야말로 ‘황우석, 그 후 10년’을 맞는 우리가 진정 가야 할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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