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가 몸을 움츠러들게 하는 걸 보니 머지않아 세상은 봄꽃으로 환해질 것이다. 산과 들에서 피어나는 숱한 꽃을 보면서 “이름 없는 꽃”이라고 했다가 선배에게 혼난 예전의 동료가 생각난다. 선배는 “이름 없는 꽃이 어디 있어? 네가 모를 뿐이지” 했다. ‘이름 없는 꽃’이 아니라 ‘이름 모를 꽃’이라고 써야 한다는 것이다.
꽃이든 사람이든 이름을 안다는 것은 상대를 알아가는 첫 단계다. 그런데 나는 영 사람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분명 서너 번은 만난 것 같은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때는 참 난감하다. 그럴 때 ‘누구입니다’ 이름을 밝히며 인사하면 좋으련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속으로 “그렇게 묻는 시간에 이름을 말하는 게 더 낫겠다”고 투덜거리지만 상냥한 표정으로 답한다.
“뵌 것 같긴 한데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제가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해요. 아마 앞으로도 세 번은 더 가르쳐주셔야 할지 몰라요.”
이렇게 궁색한 말을 늘어놓는 게 싫어서 나는 모처럼만에 만나는 사람에게 “내가 누군지 아느냐?”는 말을 하지 말 것, 특히 어른들께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고 뵐 때마다 “누구입니다”라고 정중히 이름을 말하라고 아이들을 가르친다.
대부분 우울한 미래를 예측하는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등장인물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고유한 이름 대신 숫자나 기호 같은 걸 부여하는데, 그것이 인간에게서 개성을 빼앗고 집단화, 기계화시키는 수단이다. 사람이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일련번호 따위로 불릴 때 얼마나 삭막하고 암울한지 새삼스럽게 우리에게 이름이 있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말 그대로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세상을 살고 있고 그 이름을 명예롭게 지키고자 때로는 목숨까지 던지지 않는가.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 속 인물들의 이름은 곧 그분들이 평생을 헌신한 결과다.
사람 이름도 외우지 못하는 주제에 요즈음 나는 ‘이름 모를 꽃’의 이름을 알려고 마음먹었다. 학창시절에 영어단어 외우듯이 야생화 사진첩을 자주 들여다본 덕분에 바람꽃, 앵초, 물봉선화같이 어여쁜 꽃 이름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이 꽃들을 만나면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어서 빨리 이 꽃들이 피어나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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