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 외상 “14년 걸쳐 어렵게 타협한 조약… 불만 있으면 보완하면 되는데”
이동원 외무 “요즘 세상엔 자기주장만 가득… 유엔서 다투는 韓日 너무 참담”
시나 외상 “양국관계 애썼던 기시 前 총리… 손자 아베 총리를 어떻게 볼지”
이동원 외무 “故박대통령도 완고한 따님을 어떻게 보고 계실지…”
한일 기본조약이 맺어져 국교가 열린 것은 1965년의 일이다. 14년에 걸친 어려운 협상을 타결한 주인공은 한국의 이동원 외무부 장관과 일본 시나 에쓰사부로(推名悅三郞) 외상이었다. 이 두 사람이 하늘에서 맞닥뜨려 대화를 나눴다면 어땠을까.
이: 이야, 시나 장관 아닙니까. 반갑습니다.
시나: 이런, 이 장관. 내 아들 같은 나이인데 벌써 여기에 있으리라고는….
이: 아닙니다. 그 시절은 30대로 아직 젊었지만 7년쯤 전부터 여기에.
시나: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도 아직 40대. 여러분은 젊고 활기가 있었죠.
이: 하지만 시나 씨는 노련한 거물이었습니다. ‘굴욕 외교 반대’ 시위가 달아오르던 서울에 와 김포공항에서 성명을 낭독했지요.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울 뿐으로 깊이 반성합니다”라고. 그것은 역사적이었습니다.
시나: 요즘이라면 대단한 표현이 아니지만, 어쨌든 첫 사과라 긴장했어요.
이: 일본 국내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사죄는 진짜 어른이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강행했지요.
시나: 하지만 호텔로 향하는 도로가에서는 시위대가 “시나 돌아가라” “굴욕 외교 반대”라고 외쳤고 차에는 계란이 날아왔죠.
이: 그걸 꾹 참아냈지요. 대국을 보는 눈과 어느 정도 각오를 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죠.
시나: 그렇게 치켜세우지 마세요. 당신도 필시 힘들었겠지요.
이: 하지만 협상을 타결하라고 대통령이 단호한 결의를 보이셨으니….
시나: 대통령은 기백이 있었지요. 그래도 몇 년 전에 일본에 와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 등과 만났을 때는 매우 겸손하게 행동했습니다.
이: 아주 정중하게 “선배님, 도와주십시오”라고 했지요. 국내에서는 굴욕 외교라고 비난받았지만 가난하고 황폐한 한국의 미래를 생각한 끝에 보인 겸손이었습니다.
시나: 정중하지만 기골이 있는 견실한 상대라는 인상을 줬지요. 비슷한 연배였던 일본 정치가들도 그 만남 이후 꼭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지요.
이: 외교는 인간끼리 하는 것이니까요. 그렇다 치더라도 시나 씨는 인간미가 넘쳤습니다. 서울에서 협상이 난항하면 낮부터 “함께 술이라도 마시자”며 코냑을 꺼내 깜짝 놀랐습니다.
시나: 하하하. 어쨌든 어려운 문제투성이였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이: 1910년 한일강제병합은 당초부터 무효라든가, 한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우리의 주장을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죠. 독도 건도 난제였습니다.
시나: 3박 4일 일정이었지만 협상은 전혀 진행되지 않고 시간이 지날 뿐. 그래도 끝까지 지혜를 모아 마침내 합의한 것은 일본으로 가는 날 새벽이었죠.
이: 시나 씨는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의 허가도 얻지 못한 채 대단한 결단을 했습니다.
시나: 그 시간에는 허가를 얻기가 어렵죠. 그렇지만 톱의 눈치만 보고 있으면 큰일은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총대를 메지 않으면….
이: 덕분에 국교가 맺어져 경제 협력으로 한강의 기적도 실현됐습니다. 최근에는 한류 붐도 일었는데 여러 문제가 분출해 한일 관계는 참담한 상황이 됐습니다.
시나: 그 조약은 어려운 타협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모순도 있고 불만인 점도 있었을 것입니다. 50년이나 지나면 상황이 달라져 파열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를 잘 보완해 나가는 것이 정치·외교의 지혜가 아닐까 합니다.
이: 하지만 요즘 세상에는 자기주장만 가득합니다. 유엔에서 한일이 다투는 건 시곗바늘이 언제쯤으로 돌아간 것인지….
시나: 세계의 웃음을 살 일이지요. 내 친한 선배였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는 한일 관계에 심혈을 기울인 분입니다. 이 참상을 초래한 손자를 어떻게 보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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