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주방 출입을 허락받았던 1993년이었다.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오전 8시. 22세의 여자가 도마 앞에 섰다. 칼을 잡은 후 호흡을 가다듬었다. 곤약을 쥔 손가락 끝이 살짝 떨렸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곤약 끝을 노려봤다. ‘창호지처럼 잘라야해. 잘라놓은 조각을 놓으면 접시가 투명하게 비칠 만큼….’ 하지만 무심한 곤약은 다시 두껍게 썰렸다. 1mm. 이 정도 갖고는 어림도 없다.
구근식물로 만든 가공식품인 곤약은 200g에 1000원도 안될 만큼 싸다. 그러나 그 감촉은 kg당 4만 원이 넘는 비싼 복어와 같다. 복어회의 맛은 얼마나 얇게 써느냐가 좌우한다. 조금만 두껍게 썰어도 질겨서 맛이 안 느껴진다. 김선미 신라호텔 일식당 ‘아리아께’ 책임주방장(43)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맡은 첫 일은 주방 하수구와 천장 청소였어요. 정해진 출근시간에 나가면, 제 일을 하느라 다른 선배들의 기술을 배울 틈이 없었어요. 정식 출근시간인 오전 10시보다 훨씬 먼저 출근하는 게 해결책이었지요. 제 일을 다 한 뒤에는 선배들 일하는 것 지켜보는 것이 허락됐으니까요.”
처음부터 일식조리사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고교시절이던 1988년, 서울올림픽을 보면서 ‘앞으로 한국이 국제화되면 외국 손님이 많이 올 터이고 그러면 호텔과 관련된 일이 유망하지 않을까’ 막연하게 꿈을 꾸었다. 전문대 졸업을 앞둔 1991년 말 신라호텔에 입사했다. 호텔에 입사해서도 자신에게 맞는 직종을 정하려고 여러 업무를 고민했다. 연회예약 같은 사무실 근무는 적성에 안 맞았다. 문득 ‘평소 생선 맛있게 잘 먹는데 일식을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때 횟집을 했던 친정 엄마의 영향도 있었다.
내내 무시했던 선배 “이젠 인정”
배우면 배울수록 일식은 끌리는 매력이 있었다. 재료 본연의 맛을 그대로 살리는 요리, 자연을 따라가는 맛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리 수련은 쉽지 않았다.
“텃세가 없었다면 거짓말이지요. 유독 제게 쓴소리를 하는 주방장이 한 분 있었는데 ‘여자는 끈기가 없어서 끝까지 못 배운다’고 무시하기 일쑤셨지요.”
주방 내 차별 외에 또 다른 벽이 그녀를 가로막았으니 다름 아닌 손님들이었다.
“한 정치인 손님은 저를 보더니 ‘여자가 만든 일식은 먹고 싶지 않다’고 대놓고 이야기했을 정도니까요. 그렇다고 좌절하면 그걸로 끝이에요.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기회지요.”
고급 일식에 도전하는 여성 자체가 드물다 보니 여자는 손이 따뜻해서 스시를 못 만든다는 세간의 편견을 믿는 사람도 많았다.
“남자고 여자고 요리하는 사람은 손이 따뜻할 수가 없어요. 위생 때문에 일단 손을 자주 씻습니다. 생선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손질하기 전 얼음물에 손을 계속 담그게 되거든요.”
그는 생선비늘 손질부터 생선 포 뜨는 기술을 착실히 배워나갔다. 그러나 왼손잡이인 것이 요리사로는 큰 결함이 됐다. 왼손잡이용 칼이 있기는 했지만 좁은 공간에서 일하는 주방장들이 줄을 맞춰서 조리하는 일이 많은 만큼 혼자만 왼손으로 칼질을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했다. 급하게 칼질하다 요리사들끼리 손 방향이 달라 손을 베이기도 할 정도였다. 그는 결국 오른손도 왼손만큼 쓸 수 있을 만큼 연습을 거듭했다.
‘얼마나 갈까’ 시큰둥하던 선배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실수에도 더 엄해지고 시시콜콜 잔소리가 뒤따랐다. 그건 미워서가 아니었다. 마침내 그녀를 훌륭한 일식요리사로 만들기 위한 진심이 담긴 교육이었다. 여자라고 무시했던 한 선배는 퇴직을 앞두고 김선미 셰프를 불렀다. 그러고 이렇게 말했다. “넌 내가 인정한다.”
음식에 향 밸까봐 화장품도 안발라
김 셰프는 2008년 신라호텔 ‘아리아께’ 책임주방장으로 승진했다. 신라호텔 외국 음식 레스토랑에서 여성이 ‘수장’을 맡은 적은 처음이었다. 신라호텔 외에 다른 특급호텔 내 일식당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지금 그는 18명의 남자 셰프를 통솔한다.
자부심이 강한 집단을 어떻게 통솔했을까. 기자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갑자기 “야-아-아. 집중해! 집중!” 하며 주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식당을 가르는 서늘한 목소리에 순간 기자의 몸이 움찔할 정도였다.
“제가 군대는 안 갔다 왔지만 군대 갔다 온 남자들 말이 주방 일 배우는 일이 군대 훈련보다 더하다고들 해요. 음식은 흐름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막내가 단무지를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해서 고춧가루 하나가 단무지 그릇에 묻어 나갔다고 합시다. 메인요리를 맛보기도 전에 손님 기분이 먼저 상합니다. 그릇에 먼지가 묻어 있을 경우 그 다음 사람이 그 위에 사시미를 담으면 그때부터 요리가 망쳐집니다. 음식에 사소한 과정이란 없습니다.”
그는 오전에 업무를 준비할 때 후배들을 모아놓고 “요리와 서비스에 혼을 담자”라고 구호를 외치며 박수를 세 번 짝짝짝 치면서 집중력을 가다듬는다고 한다.
점심시간이 시작되면 주방 내 긴장감은 더욱 높아진다. 주문이 몰리는 한두 시간 내에 코스요리가 빠짐없이 나가야 한다. 한 사람이 하나의 요리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협업해 완성해야 하는 만큼 누군가의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김 셰프는 회사에서는 휴대전화도 꺼놓는다. 집에 전화를 거는 일도 없고, 집에서도 일절 전화를 걸지 않는다. 손에 핸드크림도 바르지 않고 얼굴에 파운데이션 한번 발라 본 적이 없다. 음식에 화장품 냄새가 밸까 봐서다. 스무살 이후로는 머리를 길러본 적도 없다. 항상 남자처럼 짧은 커트머리다.
나에게 요리는 고통
그가 이렇게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배경에는 가족들의 헌신이 있었다고 한다. 중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을 키워 주기 위해, 지방에 사는 시부모님은 14년 전 아예 서울로 와 육아를 도맡아 줬다. 출퇴근을 위해 집도 직장 바로 앞으로 이사했다. 경기 화성에서 피자가게를 하는 남편이 최고의 일식요리사를 꿈꾸는 아내를 위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해 가능했던 일이다.
그의 요리철학은 무엇일까. 약간 당황스러운 답이 나왔다. “요리한 지 20년이 되니까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아주 ‘쬐끔’ 감이 생겼어요.” 그의 말이 이어졌다.
“한때는 제 요리에 자신감이 느낄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하면 할수록 너무 어려워요. 초긴장하지 않으면 요리가 안 되고, 또 혼자 잘한다고 해서 잘 나오는 게 아니에요. 앞으로 10년간 실력을 더 쌓고, 이후 30년차가 됐을 때 조금이라도 제 색깔을 낼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어요.”
고객들은 냉정하다고 했다.
“이거 맛있는데 또 주시면 안 될까요”라는 말을 들은 날은 뛸 듯이 기분이 좋다고 한다. 반면 자주 오는 고객들의 쓴소리는 비수처럼 가슴을 판다. 다른 때와 똑같은 레시피(조리법)로 똑같은 재료를 써서 지리(맑은 탕)를 끓였는데도 맛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있는 그대로 고객들의 평을 받아들인다. 그 대신 왜 맛이 없었는지 분석해보고 메모장에 여러 가지 예상 원인을 기록해 둔다. 점심과 저녁 사이에 주어지는 휴식시간은 그에게는 쉬는 시간이 아니다. 요리에 도움이 되는 책을 보거나 자료를 정리하는 시간이다.
인터뷰 내내 생글생글 웃던 그의 얼굴은, 요리 이야기를 할 때는 무척 어두워졌다. 심지어 우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음식은 그에게 단순히 배고픔을 면하게 하는 먹거리만의 의미는 아닌 듯했다.
“60세 넘은 요리사를 만났는데 열정이 20대보다 더 뜨거웠어요. 그분은 웃으면서 요리를 만들더라고요. 진정 즐기는 것 같았어요. 저는 아직 안돼요. 제게 요리는 고통이네요.”
▽약력
― 1992년 진주전문대 관광과 졸업(現 한국국제대) (주) 호텔신라 입사 ― 1993년 신라호텔 일식당 아리아께 근무 ― 1996년 일본 오쿠라호텔 및 호리가와 스시 전문점 연수 ― 2001년 서울국제요리대회 건강부문 금상 ― 2006년 경기대 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졸업 ― 2008년 책임주방장 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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