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내 곁의 스파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18일 21시 30분


종북 利敵세력이 활개 치는 나라…청와대 발밑에는 간첩 없을까
거대한 행정조직 되어버린 국정원…‘비범한 野性’ 창출이 진정한 개혁
‘도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
한국판 모사드는 그저 헛꿈인가

배인준 주필
배인준 주필
“오빠는 간첩”이라고 여동생이 한 말이 위장탈북자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34세)에 대한 간첩혐의 수사의 실마리였다. 그 말이 진실일까 위증(僞證)일까. 국정원은 함정에 빠졌던가. 화교라는 ‘그 오빠’의 이름은 북한에서는 류가강, 2004년 한국 국적을 취득할 때는 유광일, 그 뒤 2010년 유우성으로 바뀌었다(생년월일도 2차례 변경). 2007년에는 한국인으로 연세대 중문과에 편입하고, 곧바로 유가강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호구(戶口)도 취득했다. 한국인 유우성이자 중국인 유가강은 2008년 영국 어학연수 때는 조광일이라는 변성명(變姓名)으로 난민카드를 발급받아 파운드화(貨)로 난민지원금을 타 썼다.

그는 서울중앙지법 법정에서 “그냥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작년 8월 22일 1심 판사는 “설령 피고인에게 유죄 의심이 간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며 간첩혐의 무죄 판결을 내렸다. 국정원은 유우성을 “신분위조 전문가”라고 했지만, 오히려 한국은 ‘마음만 먹으면 유우성 정도는 할 수 있는 나라’임을 드러냈다.

대한민국은 간첩을 유쾌한 이웃 정도로 묘사하는 영화가 판치는 나라가 되었다. 실제 상황에서 간첩은 국가 흥망을 가를 수 있다. 중국 공산당 여간첩 선안나(沈安娜)는 1937년 속기사로 국민당에 위장 취업했다. 그녀는 1949년 공산당의 승리로 국공(國共)내전이 끝날 때까지 국민당 정보를 공산당에 넘겼다. 장제스(蔣介石)가 아침에 어머니 욕을 하면 마오쩌둥(毛澤東)은 저녁에 그 내용을 알았다고 할 정도였다. 등잔 밑의 공산당 스파이를 10여 년간 눈치 채지 못한 장제스는 정보전에서부터 마오쩌둥에게 완패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요원 엘리 코헨은 카밀 타베스라는 레바논 이주 시리아인으로 위장하고 멀리 아르헨티나로 날아간다. 나중에 시리아 대통령이 되는 아르헨티나 주재 시리아 무관 아민 알하페즈 장군 등과 깊이 사귄다. 그 후 시리아에서 결정적인 군사정보 등을 빼낸다. 이스라엘의 모셰 다얀 장군은 1967년 6일전쟁에서 시리아에 대승한 뒤 “코헨이 아니었다면 골란고원 요새 점령은 영원히 불가능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옛 동독 간첩 귄터 기욤은 1956년 동독 탈출 망명자로 위장해 서독에 정착했고, 사민당에서 경력을 쌓은 뒤 1970년 빌리 브란트 총리 휘하의 연방총리실 직원이 되고, 1972년 총리 당무비서가 되어 브란트의 일정과 문서를 관리했다. 친구처럼 휴가에 동행할 만큼 브란트의 신뢰를 받았던 기욤이 동독 스파이로 밝혀진 것은 서독 ‘위장망명’ 18년 뒤인 1974년이었다.

“남조선에서는 고시(高試)만 되면 행정부 사법부 어디든지 파고들 수 있다. 검열된 학생 중에 똑똑한 아이들은 데모에 내몰지 말고 고시를 하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라”고 한 김일성의 대남공작 지시는 얼마나 실현되었을까. 종북 이적(利敵)단체가 활개 치는 대한민국의 베일을 다 벗길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청와대를 포함한 국가 중추기관 어디에도 간첩이 없을까.

유우성이 대량의 탈북자 정보를 북한에 넘겼다는 국정원 수사 내용이 사실이라면 탈북자들의 신변이 위태로울 수 있다. 그럼에도 국가안보나 다수 탈북자들의 안전보다 간첩 피의자 한 사람의 인권을 더 강조하는 변호사, 국회의원, 언론이 정의(正義)를 외치는 것이 오늘의 한국이다. 이런 현실에서 대한민국 국정원은 유우성 사건이라는 작은 수사업무 하나에서 쩔쩔매고 있다.

거대한 행정관료 조직이 되어버린 국정원의 대북·대외 공작과 방첩(防諜)분야 전문성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조직의 비범한 야성(野性)을 창출해내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국정원 개혁이다. 남재준 원장과 휘하 차장들이 이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면, 이야말로 인사(人事)요인이다. 1970년대 이후 장기침체에 빠진 이스라엘 모사드를 다시 사자(獅子)로 부활시킨 것은 10대 국장(2002∼2010년 재임) 메이어 다간이었다. 그는 재임 전반 3, 4년 사이에 공작·작전파트를 대폭 강화하는 등 대대적 조직개혁을 이뤄냈다. 박근혜 대통령과 남 원장은 국정원의 역할과 운명을 놓고 ‘한국판 모사드’를 꿈꾸어 보았는가.

‘도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성경 잠언 11장 14절). 모사드는 이 모토를 실행하며 이스라엘을 지키고 있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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