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7월 2일 독일 뷔르템베르크의 콘스탄체 호숫가. 길이 128m, 지름 12m의 거대한 비행선이 하늘로 두둥실 떠올랐다. 비행선은 16마력짜리 엔진 2기로 프로펠러를 돌려 30여 m 공중에서 시속 27km로 20여 분간 비행했다. 독일 장군 출신의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백작이 만든 최초 비행선의 성공적 데뷔를 지켜보던 관계자들은 환호했다. 미국에서 라이트 형제가 동력 비행기의 첫 시험비행에 성공하기 3년 전이었다.
이후 체펠린 백작은 비행선 운항업체를 설립해 1914년까지 3만4000여 명의 승객을 실어 날랐다. 체펠린 비행선은 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런던 폭격에도 사용됐다. 당시로선 비행기가 다다를 수 없는 높은 고도에서 무차별 폭격을 퍼붓는 독일 비행선은 영국민에게 ‘저승사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1920∼1930년대는 비행선의 황금기였다. 더 커지고, 엔진 성능도 개량된 비행선은 장거리 운송수단으로 각광을 받았다 1928년 그라프 체펠린호는 30여 명의 승객을 태우고 세계일주에 성공했다. 최대 시속 128km로 대서양 상공을 오가는 비행선은 그 시대 세계인들에게 매혹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1937년 5월 ‘하늘의 타이타닉’으로 불리던 힌덴부르크호의 폭발 참사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축구장 3배 크기의 이 비행선은 미국 뉴저지 주 레이크허스트 공항에 내리기 직전 갑자기 폭발해 승객과 승무원 36명이 희생됐다. 당시 유일한 헬륨 대량 생산국이었던 미국이 나치 독일에 헬륨 수출을 거부하자 폭발 위험이 큰 수소 기체를 비행선에 사용한 게 화근이었다. 이후 비행선의 인기는 급격히 쇠락했다.
종말을 맞은 듯했던 비행선은 2000년대 들어 부활의 기지개를 켰다. 석유 고갈 위기로 인한 고유가와 이산화탄소(CO₂) 등 온실가스 배출로 초래된 환경오염의 ‘구원투수’로 비행선은 다시 주목을 받았다. 미국과 독일, 프랑스 등 각국에서 비행선을 관광과 학술탐사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적극 활용했다.
특히 군사 분야에서 비행선은 큰 두각을 나타냈다. 미국은 2000년대 초부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전에서 공중 감시 및 정찰용으로 수백 대의 무인 전술 비행선을 운용했다. 광학카메라와 적외선 레이더, 통신 감청장비를 탑재한 전술 비행선은 지상 10km 상공에서 낮과 밤에 상관없이 적진 깊숙한 곳의 동향을 샅샅이 파악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비행선의 군사 효용성이 높아지자 축구장 크기의 초대형 전술비행선 개발도 추진되고 있다. 미국의 한 방산업체가 개발 중인 ‘장기체공복합정찰기(LEMV)’는 길이가 137m에 달하고, 지상 6000m 이상 고도에서 몇 주간 쉬지 않고 가동할 수 있다. 기존 비행선이나 무인정찰기(UAV)보다 훨씬 많은 감시 장비를 탑재한 이 비행선이 실전 배치되면 광범위한 지역에 대해 보다 신속 정확한 정찰 임무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최근 미국 국방부는 적대세력의 미사일 공격 등 테러 위협에서 백악관과 의회를 보호하기 위해 올 하반기 워싱턴 상공에 전술비행선을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길이 73m짜리 풍선 형태의 비행선은 최대 500km 이상 떨어진 물체를 식별할 수 있는 첨단 레이더가 탑재될 예정이다.
한국군도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 이후 서북도서의 대북감시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술비행선 도입사업을 추진 중이다. 백령도 상공에 각종 탐지장비가 탑재된 비행선을 띄워 서북도서와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북한군 동향을 파악하는 게 골자다.
하지만 240억 원이 투입된 이 사업은 4년째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지난해 말 백령도에서 시험 가동에 나섰던 비행선 2대가 잇달아 파손되거나 추락하는 바람에 실전배치가 계속 미뤄지고 있다. 군 안팎에선 사막이나 내륙지역에서 주로 운용하는 전술비행선은 강풍 등 기상조건이 나쁜 서북도서에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각에선 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군 당국은 올 상반기 안에 정확한 사고 원인을 규명해 사업 추진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전술비행선이 우리 군의 ‘안보지킴이’로 비상(飛上)할 수 있을지, 이대로 좌초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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