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의 고질병 가운데 하나. 다른 정당이 하는 일을 혹독하게 비판했으면서도 얼마 안 가 그 정당이 반드시 똑같은 일을 따라하는 것. 그러면서도 언제 남을 욕했느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하는 일을 정당화한다. 선거 때면 이런 고질병은 더욱 깊어진다.
2012년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꾸었을 때 야권은 일제히 모진 공격을 퍼부었다. “포장을 바꾼다고 내용이 바뀌느냐”는 등. 그러나 얼마 전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은 그저 합성한 이름 아래 헤쳐 모였다. 이전에 그들이 했던 말 그대로 포장만 바꾸었을 뿐이다. 의미심장한 정치 역사를 만드는 것처럼 이합집산을 정당화했으나 그 포장 안에 뭔가 새로운 내용이 있는지는 아마 그들도 잘 모를 성싶다. 부랴부랴 만든 정당의 새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은 ‘선거철이 다가왔구나’, 느낄 따름이다.
새누리당도 별반 다르지 않다.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몽준 의원이 여론조사로 대통령 후보 결정을 할 때나, 지난해 문재인 의원과 안철수 의원이 역시 여론조사로 대선 후보 단일화를 하겠다고 했을 때 그들(당시 한나라당)의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 새누리당이 지방선거 경선을 오로지 여론조사만으로 결정하겠다고 한다. 여론조사의 문제를 지적하던 어제 일은 아예 잊어버린 모양이다. 새누리당은 제주 지사 후보를 ‘100% 여론조사 경선 방식’으로 뽑기로 했다. 광주와 전·남북 광역자치단체장 후보 역시 같은 방식으로 선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전적으로 여론조사를 활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지역의 각종 경선에는 여론조사 20%를 반영하도록 한다. 원래 여론조사로 후보를 뽑는 방식은 지금의 야당들이 좋아했던 것이니 그들도 곧 뒤따를지 모르겠다.
왜 한국의 정당이나 정치인들은 여론조사에 그렇게도 목을 매는가? 대통령 후보든 시장, 도지사 후보든 어떻게 여론조사로 뽑는가. 여론조사로 후보를 결정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여론조사는 여론을 알기 위한 조사일 뿐이다. 선택을 위한 참고자료일 뿐이다. 결정 방법이 아니다.
현대 민주주의 선거에서 여론조사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부인할 수 없다. 투표는 단순한 개인의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마음을 먹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여론조사 결과를 알기를 원한다. 선거의 분위기를 감지하는 데 이만한 방법을 찾기 어렵다. 우리나라와 같이 심하게 바람을 타는 선거가 잦은 곳에서 지지의 추이를 알기 위해서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과거 여러 번 선거에서 경험했듯이 결과를 예상하는데도 비교적 정확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200년이 가까운 역사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가 아직 ‘뛰어난 과학이기보다 정밀성이 떨어지는 위험한 기술’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는 것은 결정적 실수가 꾸준히 일어나는 탓이다.
2012년 4월 총선에서 77억 원을 들인 방송 3사의 공동출구조사가 틀렸다. 이어 대선때 한 뉴스 채널도 지상파 방송들과는 달리 문재인 후보가 박근혜 후보를 3% 이상 이기는 출구조사 결과를 보도했다가 틀리고 말았다. 이 방송의 조사는 상당한 파장을 낳았다. 틀린 것 말고도 공식 보도 시점까지 엄격하게 통제가 되어야 할 조사 결과가 투표일 오후부터 미리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 여러 종류의 조사 결과가 소셜 미디어 등을 통해 돌아다니는 가운데 이 방송사의 결과가 다른 것들과 유난히 달랐기 때문에 유권자들은 물론이고 정당 관계자들도 크게 술렁댔다. 오전의 출구조사 결과가 좋지 않은 것에 놀란 박근혜 후보 측이 지지자들의 투표를 독려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흘렸다는 등 갖은 음모설이 유포되었다. 미국도 2012년 대선에서 뉴욕 타임스의 네이트 실버를 제외한 많은 전문가의 예측이 맞지 않았다. 곧 총선을 치를 인도의 여론조사는 워낙 복잡한 종족 구성 등이 조사를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엉터리로 악명 높다. 그래서 전면금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런 사례들은 여론조사가 여전히 불확실하고 부정확한 기술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러 지역에서 여론조사 조작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정 후보와 유착된 언론사들이 지지도를 1위로 만들거나, 약한 상대가 출마하도록 현혹하기 위해 일부러 그 사람의 지지도를 높게 조작한다는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언론사가 임의로 만든 명단을 조사 회사에 건네 의도된 결과를 만든다고도 한다. 곳곳에서 유리한 결과를 만들어주겠다는 여론조사 브로커들이 돌아다닌다. 여론조사에 목을 매는 정치의 부작용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논란은 여론조사가 여론의 단순한 반영인지 아니면 여론 형성의 수단인지에 대한 것이나 발표 시점, 투표에 미치는 영향력, 실시 기간에 대한 규제 등에 관한 것들이다. 그것을 결정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한 논란은 없다. 여론조사를 결정 요인으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거가 대중 이벤트이며 정치적 축제가 될지 모르나 투표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비밀 행위이다. 그런 투표가 여론조사 결과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도 문제지만 여론조사로 대선 후보는 물론이고 지사나 시장 후보까지 뽑는 것은 정치후진국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정당이든 여론조사가 후보 결정 과정을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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