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SNS에서는]그녀들의 힐링여행… 나를 찾기? 보여주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1일 03시 00분


“우유부단한 나의 하루하루는 ‘스물여덟’이라는 아직도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모를 것 같은 소리와 닮아있다. 그렇게 ‘스물아홉’, 모든 것이 끝나는 듯한 단호한 소리를 가진 나이가 되었다가 ‘서른’이라는 짤막한 나이가 되겠지….”

29세인 지인이 지난해 말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서른을 앞둔 여성들의 페이스북엔 종종 ‘곡(哭)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아홉수라 그런 걸까요? ‘결혼’이라는 일생일대의 과업이 눈앞에 있는데 연애는 맘처럼 안 됩니다. 직장상사의 폭언은 3년째 들어도 내성이 생기지 않습니다. 사랑도, 일도 힘들기만 한 아홉수 그녀들…. 결국 짐을 챙겨 ‘힐링 여행’을 떠납니다.

본래 힐링(healing)은 일상생활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휴식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힐링’을 하겠다며 과소비를 일삼고, 휴식마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허세’로 가득 채우는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이 단어는 조롱의 대상까지 되어버린 듯합니다.

‘힐링 여행’은 출발부터 요란합니다. 근무시간에 소셜커머스를 오가며 가장 싼값에 제주행 비행기표를 끊습니다. 그래도 잠은 1박에 60만 원이 넘는 최고급 호텔에서 자려고 합니다. 남자 친구와 떠난다면 그가 알아서 결제하겠지만(∧∧), 여자끼리 가는 여행에선 무조건 더치페이입니다. 해변 드라이브를 하려면 차도 필요하겠죠. 값싼 국산차 대신 뚜껑이 열리는 외제 컨버터블 렌트를 선택했습니다. 신발도 종류별로 최소 2켤레, 옷도 여러 가지 스타일로 챙겨야 합니다. ‘힐링 여행’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겨야 하니까요.

힐링 여행 출발일. 사람들 북적거리는 5번 게이트 앞에 앉아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페이스북엔 ‘김포공항 국내선 라운지’에 있는 것처럼 표시해 글을 올립니다. 조용한 클래식이 흐르고, 손에 신문을 쥔 채 커피를 마시며 비행기를 기다릴 수 있는 특별 공간 말이죠. “어머, 여행가니? 부럽다”는 친구들의 댓글이 올라옵니다. 이제야 힐링 여행이 실감납니다. 관광지와 맛집에서 인증 샷을 찍고, 페이스북에 업로드한 뒤 ‘좋아요’와 댓글이 달리는 것을 지켜보다 보면 2박 3일의 힐링 여행이 마무리됩니다.

요새는 임신 중에도 ‘힐링 여행’을 합니다. 주부 커뮤니티에선 이것을 ‘태교여행’이라고 부릅니다. 검색창에 ‘태교여행’을 쳐보면 사이판 보라카이 괌 등 연관어와 함께 태교여행 패키지가 검색됩니다. 배낭여행에 비해 값도 비싼 편입니다. 그래도 주부들 사이에선 불룩한 배를 아름답게 감싸는 원피스와 챙 넓은 모자를 쓰고 해외에서 사진 찍어 SNS에 올리는 게 대유행입니다. 커뮤니티에는 안전 혹은 금전적 이유로 여행을 반대하는 시부모님과 남편에 대한 불평도 자주 올라옵니다.

분명 힐링 여행은 내면의 나와 만나는 자기만족의 시간입니다. 늦기 전에 결혼해야 한다는 강박감, 직장인들의 고충, 임신부의 출산에 대한 두려움 등 생애 과업을 앞두고 느끼는 스트레스를 털고 치유를 할 수 있는 시간이죠. 보통 이런 스트레스의 근원에는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불편한 시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을 때 ‘힐링 여행’을 떠나는 것이죠.

하지만 힐링 여행 중에도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자신을 꾸미고, 비싼 차와 숙소를 빌려 사진을 찍습니다. 그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려 ‘좋아요’ 숫자가 얼마나 늘어나는지, 댓글은 어떤 것들이 달리는지 지켜보고 있게 되죠. 페이스북 친구들과 서로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러주는 ‘좋아요 품앗이’까지 해가며 ‘타인의 시선’에 스스로를 옭아매기도 합니다.

따뜻한 봄이 왔습니다. 여행사마다 봄맞이 ‘힐링 여행’ 상품을 내놓고 있습니다. 금요일 월차를 내고 2박 3일 힐링 여행을 가겠다는 글들도 SNS에 속속 올라오고 있고요. 여러분이 계획한 ‘힐링 여행’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진정한 나를 만나는 시간인가요? 비싼 차, 좋은 호텔, 멋진 옷을 SNS에 생중계하는 시간인가요?

김수연 정책사회부 기자 s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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