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4연속 출전 비결? “난 천재 아니다” 일찍 깨달은 덕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4일 03시 00분


[김종석 기자의 스포츠 인생극장]<14> 영원한 마라토너 이봉주

양복 차림이 영 어색했다. 안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어느 초·중학교 육상대회 개막식에서 축사를 하고 오는 길이라며 쑥스럽게 웃었다. 하회탈같이 자글자글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를 보니 그제야 ‘봉달이’가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쪽 눈 시력은 1.5로 좋은 편. 멋 내려고 쓴 도수 없는 안경 너머의 반쯤 감긴 눈도 새삼 정겹게 보였다. 20일 안양에서 만난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44)다.

○ 다시 태어나도 계속 뛸 것

2009년 전국체육대회를 끝으로 은퇴한 이봉주는 얼마 전 동아마라톤 10km 레이스에 나섰다. “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니까 재밌게 즐길 수 있었다. 선수 때는 기록과 순위 부담에 스트레스가 심했다.” 다음 달인 4월 20일 수원의 한 마라톤대회에서는 1년 만에 42.195km 풀코스에 도전한다. 총상금 300만 원을 이봉주보다 먼저 골인한 동호인들에게 나눠 준다. 만약 이봉주가 1등을 하면 300만 원은 모두 그에게 돌아간다. 그는 “비록 작은 규모의 마라톤대회들이지만 상금을 타게 되면 육상 꿈나무 장학금으로 쓸 거다. 열심히 뛰어야 한다.” 한 달 전부터 화성 집 근처에서 개인 훈련에 들어갔다.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나 매일 2시간 동안 20km 정도를 뛰고 있다. “발바닥에 물집도 잡혔다. 2시간 20분대를 목표로 삼고 있다. 망신당하면 안 될 텐데….” 마라톤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단다. “다시 태어나도 계속 뛸 것이다.”

○ 중요한 건 1등이 아니라 완주

인터뷰 도중 자신이 쓴 ‘봉달이의 4141’이란 책을 한 권 건넸다. 41세까지 41번 마라톤 완주를 한 자신의 발자취를 담은 41가지 이야기였다. “마라톤은 참 고통스럽다. 1년에 두 번 대회에 나가기 위해 3∼4개월 죽도록 고생한다. 누가 대신 해줄 수도 없다. 성적보다는 포기하지 않고 결승선을 통과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낀다.” 이봉주는 2001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 1998년 방콕과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 2연패 등 눈부신 성적을 거뒀다. 2007년 동아마라톤에서는 37세의 나이로 정상에 섰다. 그래도 화려한 순간보다는 실패와 좌절을 딛고 일어섰던 기억이 더 강렬하다고 한다. “마라톤을 흔히 우리 삶에 비유하지 않는가. 꼭 성취를 못 하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그 과정을 즐겨야 한다.”

○ 고마운 친구 황영조

이봉주는 현역 시절 풀코스 완주를 8번밖에 안 했고 26세에 은퇴한 동갑내기 마라토너 황영조와 자주 비교됐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황영조의 그늘에 가려 한동안 2인자 신세였다. “고교 2학년 때 처음 만난 영조는 당시 이미 최고였다. 나와는 비교가 안 됐다. 영조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같이 강했으며 뭔가 마음먹으면 해내고 마는 집중력이 대단했다.” 황영조는 해녀였던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강한 폐활량과 함께 파워와 스피드를 겸비한 천재형이었다. 반면 이봉주는 지독한 노력형이다.

그가 아직까지도 뛰는 마라톤 장수 비결도 거기에 있다. “남처럼 운동해서는 이길 수 없었다. 늘 맨 먼저 일어나 가장 늦게 잠들었다. 영조는 앞에서 나를 끌어준 페이스메이커 같은 존재다.” 이봉주가 20년 동안 대회와 훈련에서 뛴 거리를 합하면 지구를 약 4바퀴(약 16만 km) 돈 셈이다. 묵묵히 앞만 보고 달렸던 이봉주. 어느새 그의 앞에는 아무도 없다. 코오롱에서 한솥밥을 먹던 시절 황영조가 현재 이봉주의 부인을 소개해준 일은 유명한 이야기. “경주 전지훈련을 갔는데 내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영조가 감독님에게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허락을 받아 사내 둘이 전국 여행을 돌았다. 부산 갔다가 영조 고향인 삼척에 가서 여자 친구를 처음 소개받아 결혼까지 하게 됐다. 평생 은인이다. 흐흐.”

○ 미쳐야 미칠 수 있다

한국 마라톤은 극심한 침체기에 빠졌다. 이봉주가 2000년 도쿄마라톤에서 2위 할 때 세운 한국 기록(2시간 7분 20초)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한국 마라톤과 세계 수준과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안타깝다. 훈련 분위기나 선수들의 태도가 예전과 너무 달라졌다.” 이봉주는 중학교 때까지 농사일을 돕느라 경운기까지 몰았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그렇게 좋아하던 운동을 할 수 없었는데 그나마 마라톤은 반바지 한 장에 운동화만 있으면 할 수 있어 고교 1년 때 겨우 입문할 수 있었다. “김치만 먹고 운동했어도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평발에 왼발이 오른발보다 5mm 작은 짝발이라는 치명적 핸디캡도 극복했다. “세월은 흘렀어도 정신력만큼은 변해선 안 된다. 확실한 목표의식과 꿈이 있어야 한다.” 프랜차이즈 치킨집 사업을 하고 있는 이봉주는 대한육상경기연맹 홍보이사도 맡고 있다. 마라톤 보급과 꿈나무 육성에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언제든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맬 생각이다. 마라톤 재단과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도 있다.

○ 에필로그: 떠나는 이규혁과 김연아를 보며

이봉주는 올림픽에 4회 연속 출전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뒤 펄쩍펄쩍 뛰며 환호하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토록 원하던 시상대 꼭대기에 서보지 못한 게 아쉽긴 하지만 출전만으로도 영광이라는 올림픽 무대를 4차례 밟은 것만으로도 그는 박수받기에 충분하다. 그는 “비록 메달은 없었어도 올림픽에 6회 연속 출전한 뒤 은퇴한 스피드스케이팅 이규혁을 보며 가슴이 짠하다”고 했다. “언제 만나면 등이라도 두드려주고 싶다.” 이봉주는 2009년 최고 등급 체육훈장인 청룡장을 받았다. 그 역시 최근 논란이 된 김연아처럼 청룡장 기준 점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의 업적을 인정한 여야의원의 청원 끝에 훈장을 달았다. “이마에 태극 머리띠를 달고 뛰면 힘이 더 솟았다. 국가대표라면 누구나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그런 부분을 잘 헤아려 주었으면 좋겠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