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장애인올림픽 ‘황연대 성취상’을 만든 황연대 씨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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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장애인보다 장애인의 성공을 응원해야 합니다”

황연대 씨가 1996년 애틀랜타 장애인올림픽에서 ‘황연대 극복상’을 수상한 스웨덴의 수영선수 데이비드 레가 씨가 감사하다는 글과 함께 보내온 자서전을 펼쳐 보이고 있다. 황 씨는 장애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가정, 사회, 국가가 돼야만 이런 책이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황연대 씨가 1996년 애틀랜타 장애인올림픽에서 ‘황연대 극복상’을 수상한 스웨덴의 수영선수 데이비드 레가 씨가 감사하다는 글과 함께 보내온 자서전을 펼쳐 보이고 있다. 황 씨는 장애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가정, 사회, 국가가 돼야만 이런 책이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지난주 막을 내린 러시아 소치 겨울 장애인올핌픽 폐막식에서도 어김없이 그의 이름이 불렸다. “닥터 황·윤·다이(Whang Youn Dai).” ‘황·윤·다이’는 황연대(黃年代·76) 씨를 말한다. 51년 전에 얻은 ‘한국 최초의 소아마비 여의사’라는 타이틀이 그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이 되면 상을 만든 지 꼭 30년이 됩니다.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때쯤 되면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료로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시상식, 2008년 폐막식 공식행사로

그가 말하는 상은 ‘황연대 성취상’이다. 장애인올림픽 폐막식 때 투철한 도전정신으로 장애에 과감하게 맞선 우수 남녀 선수 1명씩을 선정해 수여한다. 그래서 최우수선수(MVP)상이라고도 한다. 국제 스포츠대회에서 한국인의 이름을 딴 유일한 상이다. 그는 이 상을 수여하기 위해 여름 겨울 장애인올림픽 때마다 폐막식 무대에 선다.

“1988년 10월 서울 장애인올림픽이 열렸을 때 내 나이 50살이었습니다. 20대부터 장애인 권익운동을 벌여온 나로서는 내 나라에서 열리는 장애인 축제를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해 4월, 마침 한 언론사가 주는 상을 받았는데 그때 받은 상금을 조직위(당시 ICC, 나중에 IPC·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에 기부했습니다. 조직위에서 나에 대한 조사를 해보고 공적을 인정했는지 상으로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상이었지만 두 번째 시상 때인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 바로 위기를 맞았다. 겉으로는 선정기준이 모호하다는 것이었지만 황연대가 세계 장애인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이냐, 계속해서 상을 유지할 필요가 있느냐는 이의제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황연대 개인이 아니라 장애인 권익 활동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강조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상은 살아남았다.

겨우 살아남았지만 상의 권위는 점점 더 올라갔다. 장애인 본인들의 권리의식이 높아지고, 장애인에 대한 일반인과 사회, 국가의 인식이 달라진 것과 맥을 같이한다. 그래서 이 상의 위상 변화는 ‘장애인 분투사’와 겹친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까지는 여름 올림픽 때만 시상했으나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이후에는 여름 겨울 올림픽 때 모두 수여한다. 애틀랜타 때부터는 시상식이 폐막식에 들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식전행사였다. 상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시상식이 폐막식의 공식행사가 되고 상 이름도 ‘황연대 극복상’에서 ‘황연대 성취상’으로 바뀌었다.

“‘극복(Overcome)’이 ‘성취(Achievement)’로 바뀐 것은 장애인의 비전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극복’은 열악한 환경 속의 장애인이 ‘도전해서 이기자’는 투쟁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데 반해, ‘성취’는 당당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공하자는 긍정적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와 IPC의 위상이 올라간 것도 분명 영향을 줬으리라 생각합니다.”

소아마비 딸 당당하게 키운 아버지

그렇다고 황 씨가 장애인들이 놓인 요즘 상황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소아마비라고 해서 대학에 떨어지거나 공무원이 못되는 일은 사라졌습니다. 장애인 고용이나 복지에 관한 법도 제정됐습니다. 장애인들이 오랜 기간 싸워서 이룬 일들입니다. 그러나 장애인들에 대한 최고의 복지는 역시 취업입니다. 이것은 싸운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특히 민간기업이 바뀌지 않으면 힘듭니다. 장애인은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받아들여줘야 합니다.”

황 씨는 세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다. 당시는 장애가 있는 자식을 ‘집안의 창피’라거나 ‘전생에 지은 죄 때문’이라며 숨기고 가두기 바쁠 때였다. 황 씨의 아버지는 달랐다.

“손님이 오면 나한테 일부러 과일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쩔뚝거리며 쟁반을 들고 가면 손님들에게 ‘우리 집 맏딸 연대인데, 세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다’고 당당히 소개했습니다. 일본인 교장 때문에 소학교에 떨어졌을 때도 장애인인 헬렌 켈러와 루스벨트 대통령 얘기를 해주며 ‘공부만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 소아마비로 앉은뱅이가 된 아이들도 많은데 너는 걸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용기를 줬습니다.”

황 씨는 서울 장애인올림픽이 끝난 직후 동아일보가 마련한 좌담회에서 “이번 대회를 계기로 그동안 골방에 갇혀 지냈던 많은 장애자들이 거리낌 없이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됐고, 일반인들의 장애자들을 보는 시각도 크게 교정됐다는 점이 큰 성과였다”고 기뻐했다. 20년 걸릴 일이 5년으로 줄었다고도 했다. 그러고 보니 당시 ‘장애자’라고 쓰던 용어는 이젠 ‘장애인’ ‘장애우’로 바뀌었다.

장애인 위해 살아온 50년

황 씨는 이화여대 의대를 졸업하고 1965년 세브란스병원 소아재활원 의사로 근무하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아마비 재활병원이었고, 원생은 30여 명이었다. 모두 내로라하는 부유층과 고관의 자제들이었다. 그런데도 원생들은 설이나 추석 때면 집으로 가길 싫어했다. 손님들만 오면 뒷방으로 가라고 해서다. 소아마비 청소년이 10만 명으로 추산되던 시절이었다.

황 씨는 소아재활원에 근무할 때 한 방송국 간부의 눈에 띄어 이름을 알리게 된다. 소아마비 여의사가 소아마비 학생들을 데리고 산보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그는 ‘이게 바로 논픽션감’이라며 감동했다고 한다. 방송국 카메라 기자들이 몰래 와서 황 씨의 다리만 찍자, 원생 하나가 눈치를 채고 귀띔을 했다. 소아마비에 걸린 젊은 여의사가 얼굴을 공개할 리가 없을 것으로 보고 편법을 쓴 것이었다. 그러나 황 씨는 “마음대로 찍어도 된다”고 촬영에 적극 협조했다. 이때의 필름이 ‘황연대 성취상’ 시상식 때 장내에 소개되는 흑백 영상으로 선수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고 한다.

1977년 10월 정립회관 개관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박근혜 씨(흰 원피스). 당시 25세. 오른쪽이 황연대 관장. 박 대통령은 개관식과 1주년 기념식에도 참석했다. 황연대 씨 제공
1977년 10월 정립회관 개관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박근혜 씨(흰 원피스). 당시 25세. 오른쪽이 황연대 관장. 박 대통령은 개관식과 1주년 기념식에도 참석했다. 황연대 씨 제공
황 씨는 원생들과 함께 청와대로 놀러갔던 일도 있다. 1965년 어린이날, TV에서 육영수 여사가 녹지원에서 아이들과 노는 모습을 본 원생들이 “선생님, 우리도 청와대 가고 싶어요”라고 말 한 게 계기였다. 그는 육 여사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육 여사는 답장을 보내 황 씨를 치하하고 “미국에 다녀온 후 연락하겠다”고 약속했다. 얼마 후 원생들의 소원은 이뤄졌다. 이 인연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10월 개관하는 정립회관에 특별지원금과 현판 글씨를 보냈다. 개관식에는 타계한 어머니를 대신해 박근혜 씨가 참석했다.

그녀는 장애인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마다 현장에 나섰다. ‘장애인의 대모’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지금 만나 봐도 ‘투사’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가 세상과 싸운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를 필요로 했는지 모른다. 28세(1966년)에 소아마비아동특수보육협회(후에 한국소아마비협회)를 만들고, 37세에 ‘정립회관’을 개관한 것도 당시 그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장애인고용촉진공단 이사장,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 상근부회장 등도 지냈다. 장애인 선수단을 이끌고 해외에 나간 적도 많다. 지금은 2014 인천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 고문, 2018 평창동계올림픽대회 및 장애인동계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장애인과 장애인스포츠 활동을 빼고는 그의 50년을 설명할 수 없다.

‘北, 평창대회 참가’가 마지막 할 일


20일 소치에서 돌아온 황 씨를 만났다. 처음에는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자신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 무척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경원 씨가 김연아 선수도 못 받은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았다며 비난 받는 것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고 했다. ‘그런 비난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면서 “제발 성공한 장애인만 보지 말고 장애인 전체를 봐 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일반 올림픽에 보내는 관심의 몇 분의 일만이라도 장애인 올림픽에 기울여 달라”고도 호소했다. 황 씨는 “일반 올림픽에 나가는 것도 대단하지만, 온갖 역경을 이기고 장애인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들이야말로 격려와 관심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했다.

황 씨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하나는 기억력이 더 떨어지기 전에 ‘황연대 성취상’을 중심으로 그간 자신이 벌여온 활동과 기록을 책으로 묶어 내는 일이다. 그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본인의 성공을 기록하자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권익 운동의 발자취를 기록하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4년 후 평창 장애인올림픽 때 북한 선수들이 참가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다시 열리는 장애인올림픽에서 북한 사람들을 꼭 보고 싶다고 했다.

기자가 황 씨를 처음 만난 건 ‘황연대 극복상’을 만들던 바로 1988년 10월경이었다. 그리고 26년의 세월이 흘렀다. 몸은 변했어도 마음은 별로 변하지 않은, 아주 오래 전의 취재원을 다시 만나보고 안도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가 물었다. “4년 후 평창 시상식에 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나는 대답했다. “30년의 세월이 흘러 한국에서 다시 ‘황연대 성취상’을 시상한 감회를 듣고 싶으니 그때 또 인터뷰를 하시죠.” 어쩌면 ‘성취’는 황연대 씨 본인이 이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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