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40>수묵화 필 무렵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2일 03시 00분


수묵화 필 무렵
―이순주(1957∼ )

겨울 지나 한층 부드러워진 바람의 붓질,
대지는 화선지였다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며 선이 굵고 힘찬
획이 그어졌다
바람이 운필의 속도를 조절하여 농담을 이룬 자리
쑥을 뜯던 당신 흰 옷자락이 흔들렸다
그때필법이능란하여비백(飛白)을만들어낸바람,
나무를 타고 올라가 꽃망울들을 매만졌다
툭툭 산벚나무의 꽃망울들이 터지곤 했다
당신 얼굴 주름살이 웃자
망울진 꽃망울들은 다투어 벙글었다
당신이 쑥대궁을 자를 때마다
묵향처럼 쑥 내음 피어올랐다
우리가 산기슭에서 두런두런 정담을 나누는 동안
정겨운 수묵화 한 폭 살아났다
이제 그만 내려가요 어머니,
대답 대신 당신은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으로
배가 불룩한 검정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가지런한 틀니 드러내며 내게 봄을 건네준 그 해
당신은 먼 길을 떠나시고
시시때때 꺼내보는
내 안에 소장된 수묵화 필 무렵


이 시가 실린 이순주 시집 ‘목련미용실’에는 어머니를 그리는 시가 여럿이다. ‘기차가 미끄러져 간다 칸칸마다 아이들 코고는 소리 이 가는 소리 냉장고 소리 어머니 해수 기침 소리를 싣고//돋보기안경 너머 기차가 달려가고 있다 애벌레처럼 밤 가운데 몸을 말고 앉아 어머니가 재봉틀을 돌리고 있다//한 땀 한 땀 박히는 일정한 걸음의 음보, 어둠을 밀어내며 기차가 달려가고 있다 한밤의 뻐꾸기 울음 두 번, 기차가 두 시를 지나가고 있다.’(시 ‘푸른 방’에서)

화자는 기억하는 것이다. 올망졸망 어린 자식들을 지키느라 밤새워 재봉틀을 돌리던 젊은 어머니의 푸른 방, 푸른 밤을. 형제들 중 홀로 깨어, 그러나 기척 없이 누워서 어머니의 재봉틀 소리를 들을 때 느꼈던 안도감이며 걱정이며 어떤 서러움을.

세월이 흘러 그 어머니 연배가 된 화자가 얼굴에 주름살 가득하고 틀니를 한 노인이 된 어머니와 보낸 어느 봄날이 ‘정겨운 수묵화 한 폭’으로 그려져 있다. 말수가 적고, 드문드문 건네는 말도 나직하고 부드러우실 화자의 어머니. 삶이 그다지 상냥하지 않았으련만 기품을 잃지 않은 노인은 대개 ‘일하는 사람’이더라. 자기 인생을 자기 힘으로 꾸려온 사람들은 어떤 어려운 삶을 살아도 당당하고, 그 당당함은 인생을 담담히,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묵향처럼 쑥 내음 피어오르는’ 산기슭에서 모녀가 봄날을 나누는 풍경이 맑고 평화롭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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