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상훈]왕회장과 바클레이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7일 03시 00분


이상훈 경제부 기자
이상훈 경제부 기자
“그 5만분의 1 지도와 백사장 사진, 그걸 들고 가 ‘네 배를 만들어 줄 테니까 사라’ 이 얘기야.”

TV광고로도 익숙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생전에 한 강연이다. 기술도 자본도 없이 조선소를 짓겠다는 일념 하나로 세계 주요 은행과 선주를 찾아다니던 시절 얘기다. 정 회장은 동아일보에 기고한 회고록에서 “얼음과 눈은 살갗을 베는 듯 차디차고 바람은 그칠 기약 없이 부는 것 같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한국 경제사의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인 ‘정주영의 거북선 담판’이 이때 등장한다. 1971년 정 회장은 자금을 빌려주기 어렵겠다는 영국 투자자에게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들었다.

“한국은 이미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든 역사와 두뇌가 있소. 쇄국정책 때문에 산업화가 늦어졌지만, 한 번 시작하면 몇백 년간 잠자던 잠재력이 터져 나올 것이오.”

정 회장의 순발력과 협상력도 대단하지만 개발도상국 신생기업의 도발적 제안을 받아들인 영국 금융계의 태도는 더 놀랍다. 정 회장의 설득에 영국 선박 컨설턴트사 애플도어(현 A&P)의 찰스 롱보텀 회장은 바클레이스 은행에 추천서를 써 줬고, 이 은행은 이를 믿고 거액을 대출해줬다.

이들이 거북선만 보고 돈을 꿔 줬을까. 아니다. 롱보텀 회장과 바클레이스는 직접 한국을 찾아가 현대가 대규모 조선소를 건설할 능력이 있는지를 치밀하게 분석했다. 특히 바클레이스는 여러 차례 면담을 통해 현대의 해외 실적과 발전 가능성, 울산 조선소 부지의 입지 조건 등을 꼼꼼히 따졌다. 정 회장의 거북선 지폐를 종이 쪼가리가 아닌 기업가 정신으로 알아본 영국 금융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한국 조선산업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 금융당국과 금융사들은 기술과 아이디어만 보고 자금을 공급하는 창조 금융과 해외 진출로 성장 돌파구를 찾겠다고 말한다. 포부는 거창하지만 아직은 동남아시아 등 몇몇 국가에 지점을 개설하거나 일부 신생 벤처기업에 수억 원의 자금을 빌려주는 정도다. 그나마 당국의 채근에 국책은행이 정책자금 일부를 지원하는 데 그치고 있다. 40년 전 현대와 같은 개도국 신생기업이 아이디어만으로 자국 예산의 15%에 달하는 거금을 빌려 달라고 요청한다면 한국의 은행가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최근 영국에서 런던의 금융가인 ‘시티 오브 런던’의 피오나 울프 시장을 만나 “한국과 영국의 오랜 신뢰를 상징한다”며 거북선 지폐를 선물로 줬다. 신 위원장이 준비해간 거북선 지폐에는 정 회장과 현대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거액을 선뜻 내준 영국 금융에 대한 존경과 부러움이 담겨 있다. 정 회장은 “영국 국력이 많이 쇠퇴했다고 하지만 금융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공신력을 가졌고 이를 바탕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회고록에 썼다. 이미 40년 전 한국 금융이 나아갈 길을 보여준 ‘왕 회장’의 선견지명이 놀라울 뿐이다.

이상훈 경제부 기자 janua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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