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조작과 관련해 취임 후 네 번째 대국민 사과를 했다. 박 대통령은 “국가정보원의 잘못된 관행과 철저하지 못한 관리체계에 허점이 드러나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리게 돼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만 “또다시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 되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강력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혀 남재준 국정원장을 해임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남 원장도 “책임을 통감한다”며 3분짜리 사과문을 읽었으나 사퇴 의사는 밝히지 않았다. 청와대와 국정원이 사전 조율한 듯한 ‘사과 행진’으로 이번 사태를 넘기려 한다면 안이한 판단이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어제 안철수 공동대표가 남 원장 해임을 요구한 데 이어 남 원장 해임촉구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특검 요구 등 정치 공세를 펼 태세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씨가 간첩이냐 아니냐지만, 작년 1심에서 증거 부족으로 무죄가 나왔다. 국정원이 2심에서 조작된 증거를 법정에 제출하는 바람에 ‘증거 조작 사건’으로 본말이 뒤집히고 말았다. 남 원장의 변명대로 ‘일부 직원들’의 잘못으로 보기에는 국정원의 무능과 잘못된 관행, 관리체제의 문제가 심각하다. 국기문란을 넘어 안보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남 원장이 사과문에서 밝혔듯 국정원이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는 정보기관으로서 각고의 노력을 다해온 것을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다고 본다. 국민이 진정 원하는 국정원의 모습도 미국의 중앙정보국(CIA), 영국의 MI5나 MI6, 이스라엘의 모사드처럼 강하고 스마트한 일류 정보기관이지, 무력화(無力化)된 정보기관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번 사건이 국정원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면 대통령부터 단호하게 나서야 한다. 박 대통령은 신년 회견에서 “국정원법 등 관련 법률을 개정했기 때문에 이제는 제도적으로 정치개입 등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원천적으로 차단됐다”고 밝혔으나 이번 사태로 국정원 자정 능력과 남 원장의 충성에도 한계가 있음이 드러났다.
북핵을 이고 있는 남북대치 상황에서 국가정보 역량 강화보다 막중한 국가적 과제가 있는가. 국정원은 본연의 역할과 기능대로 외부의 위협에는 강력하고 치밀하게 대처하고, 국내에서는 신뢰를 받는 조직으로의 체질 개혁이 시급하다. 한 차례 실패로 끝난 국정원의 ‘셀프 개혁’에 또 기대를 걸 만큼 우리는 지금 한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