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빽’과 ‘쫄다’를 許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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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썸타다’라는 말이 유행이다. 영어 섬싱(something)의 첫음절 된소리 ‘썸’과 우리말의 ‘타다’라는 동사가 합쳐진 신조어다. 정식으로 사귀기 전에 호감을 갖고 있는 상대방과의 미묘한 관계를 가리킨다.

tvN ‘코미디빅리그’의 ‘썸&쌈’, 걸그룹 씨스타 소유와 힙합 보컬 정기고의 듀엣곡 ‘썸’ 등 그야말로 요즘 대세는 ‘썸’이다. 그런데 왜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섬’이라고 써야 할 것을 굳이 ‘썸’이라고 썼을까. 만약 ‘섬타다’라고 쓴다면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이어령 씨는 ‘뜻으로 읽는 한국어사전’에서 “세상이 각박해진 탓인지 된소리로 변해가는 말이 많다”며 ‘끼’라는 말도 ‘과(科)’를 ‘꽈’로 발음하는 젊은이들의 기류에 힘입어 굳어진 말이라고 보았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어떠한 기운’을 나타내는 ‘기(氣)’와 연예에 대한 재능이나 소질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끼’를 함께 올려놓고 있다.

그런데 기와 끼처럼 뿌리가 같으면서도 풍기는 말맛은 사뭇 다른 것이 많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사용해 화제가 됐던 “깜도 안 된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처음에는 일부 신문들이 “감도 안 된다”라고 썼지만 말맛에 밀려 ‘깜’으로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백’과 ‘빽’, ‘졸다’와 ‘쫄다’, ‘강술’과 ‘깡술’ 등도 표준어와 말맛 간 괴리가 큰 낱말이다. 언중은 ‘뒤에서 받쳐주는 세력이나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표제어인 ‘백’보다 ‘빽’을 훨씬 많이 쓴다. ‘위협적이거나 압도하는 대상 앞에서 겁을 먹거나 기를 펴지 못할 때’는 ‘쫄았다’라고 하며, ‘안주 없이 마시는 술’을 열이면 열, ‘깡술’이라고 한다. 표준어보다 입말을 많이 쓰는 현상은 말맛과 글맛을 중히 여기는 칼럼 등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된소리를 즐겨 쓰는 이 같은 현상을 풀 방법은 없을까.

굳이 된소리로 낼 까닭이 없는데도 습관적으로 쓰는 것과 말맛을 살려야 하는 것을 구분해서 대접하면 된다. 족두리를 쪽두리로, 족집게를 쪽집게로 세게 발음해봤자 별로 달라질게 없다. 그렇지만 ‘빽’과 ‘쫄다’, ‘깡술’ 등은 다르다. 말맛과 의미에서 원말과는 차이가 있다. 그런 말은 표제어로 올려줄 필요가 있다. 말은 언중의 필요에 의해 생성되고 확산되므로.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썸타다#신조어#끼#빽#된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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