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 동안 세 번 고개를 숙였다.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15일 대국민사과를 하면서 그랬다. 전사(戰士)를 자처한 그에겐 평생 처음 있는 일인지 모른다. 그는 평소 걸어갈 때도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러다 물웅덩이에 빠지고 지하철 공사장 복공판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육군참모총장 때 그는 불쑥 전역지원서를 냈다. 2004년 육군 내 인사파동이 벌어졌을 때였다. 군 검찰이 수사에 나서자 거침없이 항의성 사표를 던졌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반려로 수습된 일이 있다. 남 원장은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 그가 변한 것일까. 국정원 출신의 한 인사는 “증거조작 사실을 알았든 몰랐든 원장이 사퇴하지 않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증거조작이 사실로 밝혀졌으면 그 책임은 당연히 수장(首長)이 져야 한다. 남 원장은 당초 증거조작 의혹이 불거졌을 때부터 거취를 고민했다고 한다. 검찰의 수사 발표 직후에도 청와대에 사의를 표명했으나 박근혜 대통령의 만류로 사의를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측근 중 한 명도 “그렇다”고 전했다. 국기문란이라는 표현이 맞을 만큼 사안은 중대하지만 박 대통령은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준 셈이다.
훌훌 털고 나가는 것보다 자리를 지키는 것이 때로는 더 큰 형벌이다. 지금 남 원장의 처지가 그럴는지도 모른다. 부하를 속죄양 삼아 자리를 지켰다는 정치권의 비난에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뼛속까지 군인인 남 원장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 그가 2007년, 2012년 대선 때 자신을 도왔기 때문이 아니라 강한 국정원을 만들 적임자라고 보는 것 같다.
2001년 9·11테러 직후 미국 중앙정보국(CIA) 간부들이 백악관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아프가니스탄 공작 계획을 보고했다. 알카에다 소탕 계획에 만족한 부시 대통령은 CIA 간부들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했다. CIA는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 전복 공작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CIA의 알카에다 공작은 10년 뒤 알카에다 수장 오사마 빈라덴의 사살로 이어지는 개가를 올렸다.
박 대통령이 국정원의 환골탈태를 주문하고 남 원장도 화답했다. 그러나 CIA의 성공적인 개혁은 미 의회가 주도했다. 9·11을 예방하지 못한 것이 예산과 인력의 부족이 아니라 정보 시스템의 실패라고 진단한 뒤 초당적인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제도적인 개혁을 이뤄냈다. 우리 국회가 그럴 만한 역량이 있는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국정원의 셀프 개혁에 맡겨두면 또다시 개혁의 시늉만 하고 말지 모르겠다.
분단국가에서 최고 정보기관의 중요성은 말할 나위가 없다. 더욱이 지금은 북한의 4차 핵실험을 포함한 비대칭 도발에 대비해야 할 엄중한 상황이다. 증거조작 사건의 여파로 중국 내 휴민트(인적정보)는 무너졌다. 국정원 관계자들은 “휴민트를 복원하는 데 20년도 더 걸릴지 모른다”고 말한다. 남 원장도 대북 정보망이 무너진 데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있을 것이다. 중국의 휴민트 복원을 비롯한 대북정보 강화에 직을 걸어야 한다. 강하지도 스마트하지도 않은 국정원의 근본적인 쇄신을 위해 10년 뒤를 내다보며 개혁해야 한다.
남 원장은 박 대통령의 무한 신뢰에 부응하기 위해 잠을 못 이룰지 모른다. 답은 간단하다. 국정원을 미국 CIA와 같이 강하고 스마트한 일류 정보기관으로 만들면 된다. 필요하면 외부의 힘을 빌려서라도 죽기를 각오하고 쇄신에 성공해야 한다. 그것이 국민 앞에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며 고개를 세 번 숙인 진정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만일 그가 국정원의 쇄신에 실패한다면, 물러나야 할 때 자리를 지켰다가 두 번 죽는 치욕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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