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22일 낮 12시 10분경 평안북도 용천역에서 거대한 폭발이 연이어 일어났다. 15m 깊이 웅덩이가 생길 정도로 강력한 폭발은 순식간에 16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부상자는 1300여 명. 공공건물과 가옥 8100여 동이 파손됐다. 사망자의 절반과 중상자의 상당수는 어린 학생들이었다. 역에서 약 200m 떨어진 용천소학교가 최대의 피해자였다. 무너진 학교 지붕 아래서 몸으로 학생들을 덮은 채 숨진 여교사가 발견되기도 했다.
당시 동아일보에 입사한 직후 사회부에 배속되어 경찰서 수습기자를 끝낸 지 며칠밖에 안 됐던 기자는 북한 출신이란 이유로 사건 보도의 중심에 뛰어들어 정신없이 보냈다. 그래서 더욱 기억이 생생하다. 남쪽엔 용천역 폭발이 김정일 암살 시도라고 믿는 사람들이 적잖다. 중국을 방문했던 김정일이 바로 이날 오전 4시경 귀국했고 8시간 뒤 폭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사고 원인에 대해 질안비료(질산암모늄) 화차들과 유조차를 갈이(위치 재변경)하던 중 부주의로 유조차와 고압선이 접촉했고 이때 발생한 스파크가 화재를 일으켜 유조차와 비료 화차가 연쇄 폭발했다고 발표했다. 폭발 원인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질안비료가 약간의 유류와 혼합되면 ‘초산폭약’이라는 폭발물로 변한다. 168명이 희생된 1995년 미국 오클라호마 주정부 청사 테러, 202명이 숨진 2002년 인도네시아 발리 테러에 이런 초산폭약이 사용됐다.
그런데 훗날 기자가 파악한 화재의 원인은 전기 스파크가 아니었다. 기자는 우연한 기회에 사고 뒤 현장 수습을 했던 한 탈북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용천역 직원 중 유일한 생존자인 한 선로 감시원의 진술을 보위부 조사요원으로부터 전해 들었다며 기자에게 들려주었다. 이 감시원은 당시 용천역 입구 감시초소에 있다가 목숨을 건졌다.
감시원의 말에 따르면 용천역 화재 원인은 꽃제비(노숙인)들의 석유 도둑질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역 주변에는 수많은 꽃제비들이 중국을 오가는 열차를 노렸는데 비료 1kg을 훔치면 옥수수 2kg을 바꿀 수 있었고 석유는 더욱 비쌌다. 따라서 꽃제비들이 경비원 몰래 유조차에서 석유를 훔치다 누군가의 담뱃불 같은 원인으로 불이 났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석유 도둑이 꽃제비가 아닌 호송원일 가능성도 있다. 북한에선 호송원이 물자를 뽑아내 팔아먹는 일이 예사롭기 때문이다. 석유 도둑질이 대규모 인명 피해를 동반한 폭발로 이어지는 사례는 나이지리아 같은 후진국에선 흔히 볼 수 있다.
선로 감시원은 폭발이 김정일 암살시도설과는 거리가 멀다고 했다. 김정일이 곧 지나갈 역이면 구내에 사람들이 돌아다닐 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 4월 22일 정오의 용천역은 김정일을 맞이할 준비를 하던 긴장된 모습이 아니라 여유로웠던 일상의 풍경이었다.
어떻든 그날 용천역에서는 불길이 치솟았고 역 직원들은 물론 인근 주민들까지 몰려와 화재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몇십 분 뒤 유조차가 폭발하면서 전부 사망했다. 화재를 처음 목격한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다.
폭발사고로 제일 살판이 났던 곳은 보위부였다. 사고를 혁명의 수뇌부를 노린 테러로 규정하고 공안정국을 조성했고 2002년 11월부터 시작돼 2만여 대가 보급돼 있던 휴대전화 서비스도 중단시켰다. 보위부는 도·감청 준비가 안 된 휴대전화 서비스에 불만이 크던 차였다.
북한에서는 1980년대 중반 용천역과 유사한 폭발사고가 또 있었다. 함경북도 화성에서 군수용 폭약을 실은 화차들에 화재가 발생해 폭발한 것이다. 당시 기관사는 불이 나자 역에 정차됐던 열차를 외진 곳으로 몰고 갔다. 호송병들도 기차에서 내리지 않고 끝까지 불을 끄다 산화했다. 이들의 희생으로 엄청난 폭발에도 농가 몇십 채만 무너졌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재난 앞에서 보여준 북한 사람들의 희생정신이다. 용천역 사고 때 화염 속 유조차로 달려간 사람들, 제자를 구하기 위해 제자의 몸을 덮고 숨진 여교사, 함북 화성에서 불붙은 화차를 몰고 간 기관사들이다. 북한 사람들의 이런 행동이 총살에 대한 공포로 어쩔 수 없이 발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잘못된 인식이다. 어려서부터 교육받은 희생정신과 책임감으로 체질화된 것 때문에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들이다. 북한은 점점 부패돼 뇌물과 도둑질 없이는 살 수 없는 사회가 되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의협(義俠)은 죽지 않았다. 남쪽의 1950년대처럼 말이다.
가라앉는 배에 수백 명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먼저 도망친 선장과 선원들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저런 무책임한 행동이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때에도 기관사는 “곧 출발한다”고 방송하고 혼자 뺑소니쳤다.
혼자 살아남아 병실에서 젖은 돈을 말리던 세월호 선장 모습에서 냉혹한 자본의 논리에 인간성을 잡아먹힌 인간의 표본을 보았다. 통일이 되면 저런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 앞에서 돈을 흔들며 ‘선진국 국민’ 행세를 할까봐 우려스럽다.
10년 전 2004년 4월 북한 용천은 “나도 살자”는 도둑질이 참극을 만들었다. 2014년 4월 진도 해상에선 “나만 살자”는 이기주의가 비극을 키웠다. 꼭 10년을 간극으로 간접 체험한 남북의 두 인재(人災)가 서로의 민낯을 드러낸 것 같아 착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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