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원 국무총리의 사의(辭意)에 대해 국민은 공감하면서도 사퇴 시기에 대해서는 반응이 엇갈린다. 세월호 참사 대처 과정에서 행정부의 무능과 무사안일 무책임이 낱낱이 드러났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유능한 새 총리가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아직 사태가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사퇴는 무책임하다는 지적도 있다. 둘 다 일리가 있다. 하지만 내각 총사퇴론이 나올 만큼 정부에 대한 신뢰가 추락한 마당에 총리가 길게 자리를 보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고 수습 이후’의 조건부로 사퇴를 받아들인 것도 이런 점을 감안한 조치다.
세월호 참사는 온 국민에게 충격을 준 ‘정신적 IMF 사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았을 때, 우리나라가 이것밖에 안 되나 싶을 만큼 국민은 절망했다. 이번 참사는 정부에 켜켜이 쌓인 총체적인 문제점이 맞물려 터졌다는 점에서 인재(人災)를 넘어선 관재(官災)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에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내다본다면서 300여 꽃봉오리를 희생시킨 후진국형 참사였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가 나라인가. 정부가, 대통령이 어떤 대책을 발표해도 믿을 수 없게 됐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상주(喪主)가 된 듯 통곡하는 지금의 국면은 정 총리의 사퇴로 수습될 상황이 결코 아니다.
박 대통령은 일주일 전 “국민이 공무원을 불신한다면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다”며 “(세월호 참사를) 단계별로 철저히 규명해 무책임과 부조리, 잘못된 부분에 대해 강력히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청와대든, 국가안보실이든, 안전행정부나 해양수산부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이번 사건의 귀책사유를 철저하게 따져 문책하지 않으면 비정상 국가일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부 전체가 국민의 불신을 받고 있다는 것은 곧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나 다름없다. 견고하던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최근 여론조사에서 급감하는 추세다. 청와대 책임이 무엇보다 크다는 조사도 나왔다. 대통령은 공직자 문책을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인사(人事)는 대통령 국정 운영의 첫 단추다. 대통령이 국정의 총책임자이긴 하지만 혼자 모든 것을 꾸려갈 수 없기에 국정을 함께할 최고의 적임자를 골라 제 자리에 앉히는 인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세월호 사고에서 보듯 총리도, 장관들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특히 정 총리는 발탁 때부터 사람은 무난하지만 능력과 도덕성에서 과연 국정을 총괄할 2인자 자리에 합당한지 논란이 있었다. 이번 사고 대처에서는 존재감도 보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실종자 가족들이 총리를 본체만체하고 대통령만 찾았겠는가.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인 리콴유 전 총리는 “싱가포르의 발전을 가능케 한 요인은 유능한 각료”라고 단언한 바 있다. 그는 인사의 요체로 가장 중요한 과제를 해야 할 부처의 장관에 최고의 인재를 임명하는 것을 꼽았다. 국정 책임자가 국정 목표와 완수 시한을 제시하면 수완이 뛰어난 장관은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다. 예상치 못한 문제에 부닥치더라도 혁신적인 해결 방안을 찾아낼 수 있다. 그래서 리콴유는 정부 실패의 책임은 총리에게 있다고까지 했다.
박 대통령이 취임 전 강조했던 책임총리제와 책임장관제는 현재 없다. 최고의 인재가 아닌 ‘보통사람’을 발탁해 대통령 자신이 모든 것을 챙기는 만기친람(萬機親覽)식 국정 운영 스타일과 무관하지 않다. 총리와 장관들이 대통령의 말을 받아 적기 바쁘고, 무슨 일이든 대통령의 눈치부터 살펴서야 어떻게 공직사회를 이끌 수 있겠는가. 심지어 청와대가 부처의 간부 인사까지 일일이 간섭하다 보니 공무원들이 장관을 따르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니 무슨 일만 터지면 대통령만 바라보고, 청와대 책임론이 불거지는 것 아닌가.
박 대통령이 정 총리의 사표 수리를 오래 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세월호 사고의 수습도 중요하고 지방선거 목전에 후임 총리의 국회 인사청문회가 부담이 되겠지만, 정부의 신뢰 회복은 그보다 더 중차대한 문제다. 차제에 내각 전면 개편으로 대통령의 국정 쇄신 의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국민의 정신적 공황은 치유되기 어렵다. 현오석 경제부총리와 김관진 국방장관,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김장수 대통령국가안보실장 등 제 소임을 다하지 못했거나 정부의 신뢰 추락에 일조한 인사들도 여럿이다. 신망을 잃은 사람은 이번 기회에 과감하게 바꿔야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생길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계속된 ‘인사 참사’를 거울삼아 유능한 인재로 내각을 구성하기 바란다. 총리나 장관들이 제 능력을 발휘할 여건도 만들어줘야 한다. 그에 앞서 박 대통령이 국가 최고지도자로서, 또 행정부 수반으로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솔한 사과부터 하는 게 바른 순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