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병원에서 유학할 때 일본에서 온 동료 의사와 같은 펠로십을 하고 있었다. 매일 동고동락하다 보니 어느새 국경을 뛰어넘는 우정을 다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수대교 붕괴(1994년 10월 21일) 소식을 함께 들었다. 함께 걱정을 했지만 속으로는 좀 창피했다.
이듬해 고베에 리히터 규모 7.2의 강진(1995년 1월 17일)이 발생했다. 적지 않은 피해를 본 일본에 대해 함께 위로를 나눴다. 하지만 속으로는 일본이라고 재난에서 비켜갈 수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개월이 흘렀다. 출근하는 나에게 그 친구가 “너네 또 무너졌다더라” 하는 것 아닌가. 알고 보니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1995년 6월 29일). 결국 필자는 국가 대항 안전품격 경쟁에서 일본에 1 대 2로 판정패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재난이란 것이 남의 일 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때보다 지금 우리는 훨씬 더 잘사는 나라가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재난은 더 가까이 있다는 불안감이 높아가고 있다. 더욱이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들이 시도 때도 없이 터지고 있으니 말이다.
돌아보면 위험요소는 도처에 있다. 스키장에 가면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인간폭탄이 공포의 대상이다. 골프장에 가면 어디서 공이 날아와 내 뒤통수를 가격할지 모른다. 우리는 녹색신호등을 보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조차 안전하지 않다.
운전을 하다 보면 갑자기 끼어드는 얌체족들 때문에 혈압이 오만(五萬)으로 오른다. 운전하다 이유도 모르는 채 쌍욕을 들어야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실수로 아주 살짝 앞차와 접촉사고를 일으킨 경험은 누구나 있을 거다. 피해(?) 차량은 바꿀 필요가 없는 것까지 교환하여 거의 새 차로 만들려고 덤빈다. 아니 그것으로도 부족해 전신 건강검진 수준으로 가해(?) 차량에 덤터기를 씌운다. 국가적으로 자원 낭비이고 보험료 상승으로 이어질 텐테 자기만 이익 보면 그만이다. 아파트 옥상이나 난간은 줄 없는 번지점프대나 마찬가지다. 가위 ‘자살용 뜀틀’이다. 첨단 대형건물은 들어가기가 무섭다. 천장이 내려앉을지, 급진 차량이 밀고 들어올지, 화재가 날지 예측불허이다.
약간 냉소적으로 말하면 우리나라는 세계적 수준의 표준화를 달성한 부분이 하나 있다. 이런 대형사고가 터졌을 때 하는 대처와 반응이다. 대략 순서는 이렇다.
사건이 터진다→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한다→전문가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그룹들이 나와 설명을 시작한다→누구 탓인지 따지기 시작한다→피해자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스토리들이 양산된다→악의적인 또는 정신 못 차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족들이 거짓정보로 그들만의 야비한 ‘세상 비틀기’를 즐긴다→그리고 잊어간다.
이번 세월호 침몰도 같은 순서로 가지 않을지 우려스럽다. 정말 아쉬운 것은 정말 잘하고 있는 선박회사의 스토리 같은 것이 추가되어 간접적으로라도 뭣이 잘못된 것인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라도 되면 좋을 텐데 대개는 악의적이고 자극적인 메시지 전달밖에 없다.
결국 폭발 일보 직전의 혼란 상황을 만들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사건 종결의 끝은 대응매뉴얼을 철저히 지키지 않아서 생긴 잘못들에 대한 ‘책임 폭탄 돌리기’와 ‘징벌’에서 끝나고 정작 앞으로 어떻게 하면 적어도 같은 사고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구체적인 스토리는 항상 빠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재난은 계속 발생하고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스토리라인’은 매우 표준화(?)되어 있어 사고가 터지면 예측가능하다.
우리나라는 ‘표준지침’ 자체도 부실하지만 있다 해도 훈련을 엉터리로 해서 실전에서는 거의 써먹지 못한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의 아들딸들을 무고하게 죽이는 일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신뢰와 원칙에 맞는 대응매뉴얼을 재점검하고 혹독한 훈련을 통해 실전에 대비하자.
외과의사, 그중에서도 심장질환을 맡고 있다 보니 응급 상황이 많이 벌어진다. 따라서 응급환자들에게 일어나는 예측불허의 크고 작은 돌발 상황에 대한 신속 정확한 대응을 위해 평소 ①철저한 지식 ②혹독한 훈련 ③실제 환자 진료라는 일련의 표준 임상 진료지침 수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재난 대비의 기본은 잘 정리된 표준지침(대응매뉴얼)이 있어야 하고 이를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어야 하며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반복교육을 통해 숙지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을 머리에만 넣어 놓으면 소용이 없다. 몸에 배어 눈감고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대응메뉴얼이 있었는데도 엉터리로 훈련해 왔다면 없느니만 못하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의 아시아나기 불시착 때 보여준 승무원들의 민첩한 행동 매뉴얼은 그런 의미에서 많은 가르침을 준다. 28일자 동아일보 ‘안전 대한민국’ 이렇게 만들자 기획기사에 소개된 이윤혜 선임승무원의 말이 바로 그것을 대변한다. “순간 머리가 명료해지면서 뭘 해야 할지 보이더라고요. 훈련을 매년 해서 그런지 그냥 몸이 막….”
포항제철도 좋은 사례이다. 수천 도의 쇳물을 다루는 신입직원을 훈련시키기 위해 아예 용광로 하나를 기술 훈련용으로 할애하고 있다. 이론과 훈련이 몸에 배어 특별히 생각을 하거나 연습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익숙할 수밖에 없다.
이번 참사를 보면서 병원도 환자의 안전과 의료의 질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다시 한번 매뉴얼을 점검하고 국격에 맞는 고품격 안전관리 프로그램을 정착시켜야겠다고 다짐한다. 실천 의지만 있으면 그리 어렵지 않다. 환자들이 진정 바라는 다섯 가지 요구를 의사의 소명으로 알면 된다. ①나를 죽이지 마세요 ②나에게 해로운 약을 주지 마세요, ③나의 상처가 곪지 않게 해주세요. ④아픈 다리는 왼쪽이에요(정확한 치료를 의미한다) ⑤나를 아프게 치료하지 말아 주세요.
위험과 안전관리가 중요한 다른 조직과 기관들에도 기대한다. 일 터지고 해결하려 하지 말고 평소에 표준지침을 바이블로 인식하고 혹독한 훈련을 통해 능수능란한 예방과 신속대응 능력을 높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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