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중현]리스크 테이킹의 대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1일 03시 00분


박중현 경제부장
박중현 경제부장
“저마다 가진 소질과 꿈이 있는데 형편이 어려워서 교육을 받을 수 없거나, 이를 발휘할 수 없으면 행복할 수 없잖아요.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국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2009년 12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기자들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국민 모두가 행복한 나라’라는 기치를 들고 차기 대권 도전을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미국 심리학자 매슬로의 욕구 5단계 이론은 인간의 욕망을 다섯 단계로 구분해 아래 단계의 욕구가 실현돼야 높은 단계의 욕구로 옮겨간다는 내용이다. 최하위 1단계는 ‘생리적 욕구’, 2단계는 ‘안전의 욕구’, 3단계는 ‘사회적 욕구’, 4단계는 ‘존경받고 싶은 욕구’, 그리고 제일 높은 단계가 박 대통령이 말한 자아실현 욕구다. 대통령은 올해 2월에 일자리·복지 분야 업무보고를 받을 때에도 이 이론을 거론하며 “자기 실력과 역량을 발휘하고 싶은 것이 인간이 가진 근본적 욕구로 그걸 실현하는 게 고용과 복지”라고 강조했다.

이런 국정철학을 갖고 있는 박 대통령에게 세월호 참사는 큰 충격일 것이다. ‘국가개조’ 수준으로 나라의 전체 시스템을 싹 바꾸겠다는 얘기에서 그 충격의 강도가 읽힌다. 규제완화와 창조경제로 임기 내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열고 일자리와 복지를 확대해 국민들이 5단계 자아실현 욕구를 실현하도록 하려던 계획이 2단계 안전의 욕구가 무너지면서 어긋나버렸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는 4월 28일 “2005년 카트리나 사태 당시 미국인이 자국의 안전 부재와 대응력 부실을 절실히 깨달았듯 한국인들이 저개발국가형 재해인 세월호 사고에서 비슷한 ‘깨달음’의 순간을 맞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앞만 보고 ‘빨리빨리’ 달려온 우리 사회는 이번 사고로 성장의 뒤편에 방치했던 안전의 가치를 뼈저리게 깨닫게 됐다.

한국은 전형적인 ‘리스크 테이킹(위험 감수) 사회’다. 국민들은 ‘안전비용’이 빠진 저렴한 상품과 서비스를 선호했다. 효율과 속도를 높일 수 있다면 웬만한 리스크에는 눈감는 데 익숙했고, 크지 않은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비용을 치르는 데는 대단히 인색했다. 국가와 기업도 이런 국민의 기호에 맞춘 덜 안전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했다. 하지만 이번 사고로 그동안 밀린 위험 감수의 대가를 우리 사회가 한꺼번에 지불해야 한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문제는 안전한 국가 시스템을 새로 구축하는 데에 막대한 비용이 들 것이라는 점이다. 당장 더 신속하고 유능한 구난·구조 서비스를 갖추려면 인력과 장비에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 해운업체는 노후한 선박을 폐기하고 새 선박과 안전장비를 구입해야 할 것이다. 붕괴 위험이 있는데도 재정이 부족해 개축하지 못했던 전국의 학교 건물들도 필요하다면 모두 새로 지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국정과제와 재정배분의 우선순위부터 조정해야 한다. 수십 년간 곪은 위험 감수 사회의 근간을 수리하는 일만으로도 대통령의 임기는 짧다.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가 “국회가 앞장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강조한 만큼 야당도 공허한 정쟁 대신 국민의 ‘안전의 욕구’를 충족시킬 정책부터 여당과 함께 추진해야 한다.

다만 그 비용은 결국 국민의 지갑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국민들은 사회 전체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세금을 더 내고, 안전한 서비스에 값을 더 치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아무리 큰 비용도 진도 앞바다에서 잃어버린 수백 명 청소년들의 목숨에 비할 바 아니다.

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박근혜#고용#복지#세월호 참사#안전#안전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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