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희 칼럼]안전은 습관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6일 03시 00분


정성희 논설위원
정성희 논설위원
1987년 10월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 호화로운 호텔에 알코아(아메리카 알루미늄 회사)의 신임 최고경영자(CEO)가 기대로 반짝이는 투자자들의 눈길을 받으며 등장했다. “먼저 이 방의 비상구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화재나 비상사태 같은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지면 여러분은 저 문으로 재빨리 걸어 나가 건물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연회장 뒤편의 문을 가리켰다. 연회장엔 냉랭한 적막감이 흘렀다.

“여러분에게 노동자의 안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매년 알코아에서는 상당수 근로자가 상해를 입고 근로일수를 상실합니다. 나는 알코아를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기업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최고의 투자수익을 올리겠다는 연설을 기대했던 투자자들은 연회가 끝나자마자 밖으로 달려 나가 주식을 팔아치웠다.

1년 후 알코아는 창립 이래 최고의 수익을 올렸다. 연간 순이익은 5배 상승했고, 시가총액은 270억 달러(약 30조 원)까지 올랐다. 이 CEO가 훗날 조지 W 부시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폴 오닐이다. 안전사고 제로를 목표로 한 오닐의 계획은 정신 나간 히피나 사회주의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생산 공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탐구는 공정 개선과 품질 향상으로 이어졌고, 생산라인을 멈출 수 있는 권한을 현장에 부여하자 조직문화에 변화가 생기고 생산성이 향상됐다. 안전은 핵심 습관의 결과임을 그는 간파했던 것이다.

세계 굴지의 금융회사인 모건스탠리는 매년 직원들을 대상으로 대피훈련을 실시한 결과 9·11테러 당시 전 직원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건스탠리가 예외적 사례는 아니다. 미국과 캐나다는 기업뿐 아니라 아파트에서도 자주 소방훈련과 비상대피훈련을 한다.

최근 캐나다에서 귀국한 주부 김수은 씨의 경험담이다. “비상벨이 울려서 화재가 난 줄 알고 9층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계단으로 내려갔어요. 소방훈련이었다고 해서 무척 황당했어요. 그런데 이웃 사람들을 보니 간단한 보따리까지 들고 있었어요. 비상시에 챙겨 나올 수 있도록 중요한 물품을 담은 가방을 현관 부근에 두고 사는 거예요. 그중에는 걸음걸이를 옮기기도 힘겨운 노인 부부도 있었는데 짜증 한 번 안 내고 소방관에게 ‘생큐’를 외치며 집으로 올라가더군요.” 캐나다 생활에 익숙해질 즈음 그는 비상벨이 울려도 내려오지 않는 주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인과 중국인이었다. 소방훈련을 하라고 하면 “바쁜 사람 생고생시킨다”고 항의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국인인 나도 틀림없이 끼어 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안전불감증이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우리가 안전에 둔감한 이유는 압축 고도성장을 경험하며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문화에 익숙하고 사고가 나도 ‘나는 괜찮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는 이런 사고가 언제든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통렬한 경고를 주었지만 문제는 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안전은 정부엔 규제이고, 기업엔 비용이며, 국민에겐 습관이다. 박근혜 정부는 규제를 ‘암 덩어리’라고 했다. 좋은 규제, 나쁜 규제를 구분하는 눈도 없었다. 우리 기업들은 수익이 악화하면 제일 먼저 안전비용을 줄였다. 많은 기업이 비용 절감을 위해 안정 정비 보안 기능을 아웃소싱했다. 개인정보 유출은 우리 기업이 컴퓨터 안전에 얼마나 무관심한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들의 몸에 밴 관행을 바꾸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는 우리가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의 결과 그 자체다”라고 했다. 평생 안전을 위한 비용과 시간 따위는 무시하고 살아온 한국인의 습관이 쉽게 달라질지 의문스럽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안전#세월호 참사#안전불감증#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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