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박웅서]‘받아쓰기 장관들’ 머리에서 위기관리 상상력이 나오겠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8일 03시 00분


박웅서 전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
박웅서 전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
아무렇지도 않게 TV 화면에 나오는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 장면을 보면 심한 염려를 느낀다. 잘 준비된 연설문을 대통령이 자분자분 읽어 내려가고, 소위 장관이라는 사람들은 그 내용을 수첩에 베끼느라 바쁘다. 장관의 역할을 다시 새겨보게 된다.

공개반대 힘들면 대통령과 독대라도

장관은 전 국민과 대통령을 대신해서 생각하는 직업이다.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국가가 단기적 또는 중장기적으로 필요한 정책 변화나 수정보완 요인을 찾아서 그 분야에 존재하는 각종 문제와 어려움을 하나씩 제거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할 기초를 만들어 나가는 데 최고 책임을 지는 자리다. 수하의 관료들과 전문가에게 물어보고, 조사시키고, 토의하여 건전하고 가장 적절한 목표와 정책을 선택하는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결정은 오직 자신의 몫이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혼자 져야 한다. 대기업체의 최고경영자도 똑같은 입장이다. 차이가 있다면 결과의 평가가 소속 회사의 이익이냐 국가의 이익이냐일 뿐이다.

이렇게 결정한 정책은 자신의 직(職)을 걸고 추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장관은 대통령과 국회를 설득하고, 자기 부서의 관료들을 이해시키고, 필요한 예산과 조직을 확보하여 임기 내에 확실히 추진해야 한다. 추진 중에 상황 변화와 정책 부족으로 수정이 필요하면 지체 없이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정책 수정을 해야 한다. 이는 인간이기 때문에 항상 발생하는 불가결의 과정이다. 만일 그중 어느 하나라도 실패하면, 얼마 전 사퇴한 보건복지부 장관처럼 사표를 제출해야 한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실패의 책임은 국민이나, 대통령이나, 직업 관료들에게 떠넘길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의 책임이요 권리다.

대통령이 대북한 정책 방향을 피력할 때 또는 대일 정상회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꾸자고 할 때 장관은 그 큰 방향 설정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분야에서는 어떤 행동과 정책이 필요할지 깊이 생각하는 자리다.

기록은 제목 정도만 남기면 되고, 누구를 불러다 무엇을 물어보고 토의할지, 그 방향 설정이 자신의 분야에서는 어떤 부작용을 가져올지, 그 대책은 무엇인지 생각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때로는 대통령에게 “노”라고 해야

때에 따라서는 대통령에게 반대를 해야 하고, 공개적으로 반대하기가 어려우면 대통령과 독대라도 신청하기 위한 전략(?)도 세워야 한다. 천재가 아닌 한 대통령 말씀을 그대로 기록하는 데에 몰두하면서 다른 깊은 생각을 하겠나.

박정희 대통령은 듣기로 유명했다. 이병철 회장도 묻고 또 묻고, 그 과정을 통하여 참석자와 회장 사이에 올바른 결론이 자동적으로 공감되는 방식을 택했다. 우리 대통령은 얼마나 많은 전문가와 책임자들에게 물어보고, 조사시키고, 구두로 보고받고, 서로 반박하고, 같이 고민하는지 모르겠다. 국무회의 때 장관들이 대통령 말씀을 받아 베끼기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고도 그냥 두는 것으로 보아 독대가 쉽지는 않아 보인다.

철저한 조사와 토의 뒤에 나오는 강한 고집은 건설적 원칙주의다. 그러나 만에 하나 방향이 틀렸는데 고집을 부리면, 그것은 국가를 위해 큰 재앙이 될 수 있다. 깊은 토의 없이 고집만 부리면 대단히 위험하다. 신이 아닌 한 대통령이 어찌 모든 과제의 정답을 알겠는가.

대통령의 일반 정책이나 특정 이슈에 대한 기본 입장은 정책이 아니다. 가끔 중소기업주들을 데려다 놓고 7시간씩 대못을 뽑아도 그것은 정책이 아니다. 정책은 너무 매크로해도 안되고 너무 마이크로해도 안 된다. 개별 기업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간섭도 아니고, 큰 방향을 설정해 주는 정책이나 행동의 판단기준 설정도 아니다. 정책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공통의 룰을 손질하는 시스템 운영 방법이요 그 방법 자체의 관리를 말한다. 이 책임을 다하라고 각 부처를 만들고 장관을 임명한 것이다.

머슴 취급 장관들 누가 따르겠나

정책은 현장의 정보와 필요를 가장 잘 아는 각 부처가 만들어 청와대와의 조율을 통하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선포하거나 국회에 보내는 것이다. 이는 대통령의 책임이 아니라 장관의 책임이다. 그런데 주눅이 들어 필기나 하는 장관이 이런 일들을 해낼 수 있겠는가. 대통령의 지시가 없으면 ‘멘붕’에 들어가는 필기 장관들이 과연 독립적 사고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지금 정책 공백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은 아닐까. 세월호 사고 대책의 불비(不備)도 정책 부재의 한 단면일 뿐이다. 책임질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질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대통령과 국회가 장관을 머슴 취급하면 어느 관료가 그의 지시와 이념을 따르겠으며, 어느 국민이 정부 정책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겠나. 국내 투자가 안 된다고 하지 말고 예측 가능한 경제 운영의 의지와 통일적 접근의 자세를 보여 달라. 조령모개하는 나라에서 누가 몇 조 원을 들여 설비투자를 하고 고용을 늘리겠나.

우리나라 장관들이 기자회견에 직접 나와 주눅 들지 말고 자기 정책 의지를 발표하고, 국민을 설득하고, 어차피 비난만 할 야당 국회의원들의 고성을 각오하고 밀고 나가는 모습은 불가능한 꿈일까. 대통령이라도 장관들에 대한 신뢰와 그 위상을 의도적으로 올려주는 노력을 해야 이 나라가 정책 공백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박웅서 전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
#대통령#장관#의사 결정#위기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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