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 되었다. 가정의 달이다. 일 년 열두 달 늘 바쁘게 살더라도 나와 내 가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절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마음은 다른 해의 오월 같지가 않다. 국민신드롬이나 국민우울증이라고 불러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온 세상의 기운이 착 가라앉아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여객선이 왜 침몰했는지 원인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사고가 난 후에도 제대로만 대처했다면 모두 살릴 수 있었던 300여 명의 생때같은 목숨을 잃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사망자와 실종자의 대다수가 이 오월에 막 피어나는 신록과도 같은 열여섯 살, 열일곱 살 아이들이란 점이다. 단체로 수학여행을 가는 중이었고, 누구보다 말을 잘 듣는 아이들이어서 선내방송에 따라 질서를 유지하며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참변을 당한 것이었다.
보름 넘게 텔레비전과 인터넷에 올라오는 새 뉴스에 집중하다 보니 밥을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일을 보는 중에 가볍게 웃기라도 할라치면 저절로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얼른 손을 올려 입을 막게 된다. 한 친구는 일을 보러 안산에 갔다가 이 슬픈 도시에서 밥을 먹는 것이 죄스러워 식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고 했다.
같은 학부모여도 그런 심정은 아버지들보다 어머니들이 더하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망자 가족 인터뷰를 봐도 그렇다. 고려가요 사모곡에도 호미도 날이지만 낫같이 잘 들 리 없고, 아버지도 어버이지만 어머니같이 사랑할 이가 없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아버지처럼 무뚝뚝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세월호 사고 이후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모습이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는 것 같다.
한 후배는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전에는 성적에 대해 아내만큼은 아니지만 자신도 적잖이 신경 쓰며 압박을 주고 했는데 세월호 사고 다음부터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가 자기 옆에 건강하게 자라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낀다고 했다. 직장생활을 20년 하는 동안 정말 큰일 아니면 집에 전화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세월호 사고 후 전화도 자주 하게 되고, 퇴근 전 저녁마다 아이들의 안부를 챙긴다고 했다.
어느 택시기사는 딸만 둘을 둔 아버지라고 했다. 어릴 때는 딸이 가끔 재롱을 부리곤 했는데, 자라면서 그런 일이 거의 없다가 며칠 전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 일부러 대학생 딸 방에 가서 얼굴을 쓰다듬어 봤다. 처음엔 그런 표현을 어색해하던 딸이 이내 아버지가 왜 그러는지 마음을 알아주어 함께 뭉클해지더라고 했다.
또 친구의 이야기다.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어디로 가든 집을 나설 때는 꼭 행선지를 알리고 들어와서는 반드시 얼굴을 보이게 했다. 밖에 나가서 한 일이 곧지 못하면 어른 얼굴 보기를 피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집보다 엄격한 규율로 부모가 자식을 통제하는 것 같다고 늘 불만이던 아이들이 요즘엔 출입인사를 하는 얼굴이 더 상냥하고 공손해졌다. 자신도 아이들의 인사만 받는 게 아니라 전과는 다르게 어깨를 치고 등을 두드리며 뭔가 격려의 말을 하게 되는데, 부자간에 이런 스킨십이 새롭게 느껴진다고 했다.
나 역시 사고 이후 4월과 5월의 많은 행사를 취소했다. 그러나 몇 년째 주말마다 고향에서 하는 강릉바우길걷기 모임만은 빠짐없이 이어가고 있다. 어머니도 많이 참여하지만 아버지도 많이 참여한다. 요즘은 함께 걸으며 세월호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사고에 화도 내고 분도 삭이지만, 아버지들이 가정과 아이들에 대한 얘기를 전보다 확실히 더 많이 한다.
예전이라고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자식을 덜 사랑한 건 아니었다. 사모곡에 나오는 말 그대로 같은 날이어도 호미의 날은 낫날 같지 않고 뭉툭하다. 낫처럼 예리하지 않아도 호미가 지나간 자리의 흔적은 깊고 뭉근하다. 자기가 낳은 자식이지만, 자식들에게 너희를 사랑한다고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보지 않았던 아버지들이 요즘 전과 다르게 자식에 대한 사랑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한다. 세월호의 아픔이 이 세상에서 가장 무뚝뚝한 한국의 아버지들 마음까지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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