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대통령이 걸어 나올 곳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13일 21시 54분


指示국정의 허망 보여준 ‘救助제로’ 구름 위에선 현장 실상 보이지 않아
대통령이 읽은 보고서 어디에도 부실과 위험은 적혀 있지 않았을 것
‘국정의 함정’ 눈치라도 채려면 스스로 격리된 밀실에서 나와야
그리고 계급 감당할 사람들 찾아야

배인준 주필
배인준 주필
진도 앞바다와 청와대의 거리는 400km가 아니었다. 세월호 침몰 현장과 박근혜 대통령 사이의 상황적 거리는 더 까마득히 멀었다. 4월 16일 그날 대통령은, 오전에는 “단 1명도 피해가 없도록 구조하라”고 했고 오후에는 “단 1명이라도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거듭된 지시(指示)는 부서지는 파도만큼이나 허망했다. 현장에선 배 안의 300여 명 그 누구도 살려내지 못했다. ‘지시 국정’의 실제 결과가 이러했다. ‘모든 국민이 행복한 나라’의 실제 상황이 이러했다. 대통령의 말은 결과가 따라올 때 실체가 된다.

안전행정이 이토록 외화내빈이고, 해양경찰이 이토록 무능·비겁하며, 연안해운이 이토록 위험천만인 줄을 대통령은 몰랐을 수 있다. 안전행정부 해양경찰청 해양수산부, 그리고 이들 부처를 관장하는 청와대 비서실의 누구도 껍데기행정과 현장 무능과 국민생명의 불안을 대통령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이 황혼에서 새벽까지 읽는 깨알 같은 보고서의 어느 줄에도 그 부실과 비겁과 위험이 적혀 있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지도자는 속는 것도 리더십에 흠이 된다.

이제 대통령은 역대 정부의 적폐(積弊)를 탓하기 전에 자신이 국정의 현장 실상과 얼마나 멀리 있었는지 성찰해야 한다. 국정의 비현장성(非現場性) 비현실성이 어디서 시작되고 깊어지고 퍼졌는지 뿌리를 찾아야 한다.

모든 사건사고의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다는 것은 지나치다. 세월호 비극의 원인이 현직 대통령 재임 400여 일 사이에만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국정의 함정(陷穽)과 지뢰가 숨겨진 곳을 다 꿰뚫을 수는 없을지언정, 현장감각을 최대한 배양해 눈치라도 채야 한다. 그러자면 국정의 밀실에서 나와야 한다. 정부의 손길을 기다리고 건전성 감독을 필요로 하는 현장과 차단되고 스스로 격리된 채로, 공무원들의 보고(報告)―특히 서면보고―에 의존해 함정과 지뢰밭을 감지하기는 누가 대통령이라도 어려울 것이다.

인사권의 칼을 쥐고, 더구나 언제 레이저 광선을 쏠지 모르는 그런 대통령 앞에서 쓴소리, 귀에 거슬리는 말, 골치 아픈 얘기, 심각한 상황을 제대로 털어놓을 비서나 장관이 과연 있겠는가. 속된 말로 ‘뺀질이’들은 그토록 우직하게 자신의 목을 내밀지 않는다. 아랫사람들이 언제나 할 말을 할 수 있고, 할 말을 한다고 해서 ‘손해를 보지는 않는’ 그런 환경을 대통령이 만들어야 뺀질이들도 조금쯤은 용감해질 것이다.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바꾼 아이디어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모든 국민이 행복한 나라’라는 구호만큼이나 결과가 빈약하다. 이름 바꾸어 행정 처리 하는 데 든 국민 세금 수천억 원이 아까울 따름이다. 그런데도 경주 체육관 붕괴사고와 세월호 참사 이전에, 운이 좋아 별 탈이 없었던 것을, 안전행정을 잘해서 그런 양 대통령 앞에서 자랑한 이 정부 초대 안전행정부 장관은 대통령의 신임을 업고 인천시장 후보가 되었다. 그는 지금이라도 국민 앞에 고개 숙여 ‘1년간 안전행정을 제대로 못한 책임’을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한 책임의식을 보여줄 수 없는 사람들이 꾸며대는 감언(甘言)을 세상의 진실인 양 믿어서는 또 다른 사건사고가 터지지 않기를, 요행을 바라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가안보에서도, 국민안전에서도, 그리고 교육에서도, 경제에서도 진실로 국민을 지키고, 구하고, 경쟁력 있게 가르치고, 풍요롭게 만들라고 국민은 세금을 낸다. 그런 능력도 책임감도 없는 사람들로 청와대와 내각과 주요 처청(處廳)을 구성해 말의 성찬에 안도한다면 ‘세월호의 비극’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제복이 자랑스러운 나라’를 염원해왔지만, 지금 해양경찰청장 어깨 위에서 번쩍이는 태극무궁화 계급장은 정말 보기 싫다. 해양경찰청장의 ‘왕별’ 계급장 앞에서 묻게 된다. 국민은 관료의, 관료에 의한, 관료를 위한 나라를 지탱하기 위해 1년 중 3개월 이상을 ‘세금 낼 돈 버느라’ 피땀을 흘려야 하는가.

대통령은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하겠는가. 최고의 능력 있는 인재들을 영입해서 적재적소에 나랏일을 잘할 수 있도록 권한과 책임을 주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한 말을 기억할 것이다. 이제는 그 말을 실행해 신뢰를 회복하기 바란다. 그래야 악의적 정치선동에도 흔들리지 않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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