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대통령은 사진 애호가다. 서시베리아 토볼스크 시의 크렘린을 항공 촬영해 2010년 자선경매에 내놓은 사진이 우리 돈 약 20억 원에 팔렸다. 당시 사진을 산 사람은 러시아 유명 펄프업체 사장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현 대통령의 그림도 2009년에 약 14억 원에 팔렸다. 러시아뿐만 아니다. 북한은 김일성과 소설가 홍명희의 뱃놀이를 어린 김정일이 찍은 사진이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치켜세우고 있다.
얼굴 없는 사진작가 아해로 활동한다는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73)의 사진들이 높은 가격에 팔렸다고 한다. 아해의 홈페이지는 그가 2009∼2013년 270만 장의 사진을 찍었다고 주장한다. 4년 동안 하루 평균 1850장씩 찍었다는 얘기다.
카메라 전문업체 캐논코리아에 따르면 사진기자 한 명이 1년에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횟수가 3만∼10만 회다. 아해는 사진기자가 27년간 근속하면서 찍는 분량을 4년 만에 촬영한 것이다. 천문학적 셔터 횟수다. 유사 종교의 신격화 경향이 보이는 듯하다.
그는 해외에서 ‘나의 창을 통해(Through my window)’라는 개인전을 여는 방식으로 몸값을 높여 왔다. 세월호 사태 이후 아해 홈페이지 뉴스 코너에는 루브르 박물관 관장,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관장, 런던 스테이트 미디어라는 잡지의 편집장, 프라하 국립미술관 총관장의 동영상이 새롭게 링크됐다. 그의 사진이 단순하고 겸손하며 평범하다는 칭찬 일색이다. 작품 평가라기보다는 의례적인 감사 인사에 가깝다. 그는 2012년에만 루브르 박물관에 약 16억 원, 베르사유 궁전 시설물 복원에 약 20억 원을 기부했다.
유 전 회장 사진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까치, 직박구리, 박새, 붉은머리오목눈이, 왜가리, 고라니, 다람쥐 등이다. 흔한 소재이다. 270만 장의 사진 중에서 골랐다고 하지만 전문가 눈으로 볼 때 사진의 수준은 낙제점에 가깝다. 매일 수천 장의 사진을 정리하고 보정하고 홍보해 주는 큐레이터와 마케팅 담당자들이 있었을 텐데 이들의 능력조차 의심스럽다.
우리 사회는 그의 말에 속았다. 고등학생 수백 명의 추억을 책임지겠다며 인천을 떠나 제주로 향한 세월호는 크루즈선이 아니라 화물선에 가까웠다. 아해의 사진 한 장 값도 안 되는 월급을 받았던 선장은 제복의 책임감 자체가 없었다.
국제사회는 그의 사진에 속았다. 사진 가격이 1000만 원이 넘는다는 이 작가의 작품은 계열사 임직원들이 샀을 뿐이다. 예술을 사랑하고 환경운동을 하는 사진작가라는 이력서에는 그가 부패한 해운자본의 핵심이라는 한 줄이 빠져 있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찍은 사진이라고 해서 미학적 가치가 없다고 폄훼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유 전 회장에게 사진은 탐욕을 감추기 위한 포장지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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