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쯤의 일이다. 독자가 “억울한 일이 있다”며 만나자고 했다. 70대인 그는 서류뭉치를 한 아름 들고 본사 근처까지 찾아왔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목소리의 톤이 높았다. “구경도 못한 돈 500만 원을 무슨 수로 갚으라는 말입니까.”
사연은 딱했다. 5년 전 어느 날 휴대전화 할부금과 요금을 납부하라는 고지서가 날아왔다. 고지서에는 무려 100만 원이 넘는 금액이 찍혀 있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명의를 도용당해 개통된 이른바 ‘대포폰’ 요금이었다. 경찰이 수사에 나섰으나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고스란히 요금을 떠안게 된 그의 고통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통신사는 “일단 요금을 내고 범인에게 돈을 받으라”며 채근했다. 몇 달쯤 뒤엔 ‘○○신용정보’라는 곳에서 ‘독촉고지서 재중’이라는 빨간 글씨가 찍힌 고지서가 날아왔다. 재촉에 시달리며 5년을 버티는 동안 이자가 붙어 빚은 500만 원으로 늘었다. 방송통신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 등의 문을 두드렸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다. 그들은 “채권추심으로 힘들면 금융감독원을 찾아가 보라”고 조언했지만 얼마나 도움이 될지 눈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이 70대 노인처럼 빚 독촉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적지 않다. 당연히 갚아야 할 빚을 안 내고 버티는 이들도 있지만 당장 병원비가 없어서, 사업하다가 급전이 필요해 돈을 빌렸다가 피치 못하게 못 갚는 경우도 많다.
금융의 신뢰를 유지하려면 빚을 갚지 않는 이들에게 무한정 자비를 베풀 수는 없다. 박근혜 정부 들어 원금의 절반을 깎아 준 국민행복기금에 가장 많이 제기된 비판도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였다. 정부가 “기회는 한 번뿐”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비판을 의식한 것이다. 하지만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처럼 빚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붙들고 과도하게 빚 독촉을 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서민의 빚에는 이토록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부실기업에 대해서는 정반대다. ㈜세모의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내용이 단적인 사례다. 2245억 원의 빚 중 채권단 출자전환, 부실채권 매각 등으로 털어낸 게 1908억 원이다.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은 국민세금(공적자금)으로 정부(예금보험공사)가 떠안은 ㈜세모의 빚 146억 원을 단돈 6억5000만 원에 털어냈다.
부실기업 문제가 불거질 때 등장하는 논리가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경영자에게 엄격한 책임을 묻는 것을 전제로 기업을 살려 일자리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구조조정 과정에서 직장을 잃은 수많은 근로자를 뒤로한 채 교묘한 방법으로 재산과 기업을 지킨 경영자를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서민들에게 ‘도덕적 해이에 빠지지 말라’고 꾸짖기 전에 우선 부도덕한 부실기업 경영진의 책임을 끝까지 따져 묻는 관행부터 정착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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