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의 고통을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공감능력은 인간에게 주어진 ‘신(神)의 성품’ 중 하나일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는 2001년 9·11사태 직후인 9월 14∼16일 성인 560명을 대상으로 전화 인터뷰를 한 결과 사고 발생 지역인 맨해튼을 중심으로 재난지역에서 가깝게 살고 있던 사람일수록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결과를 냈다. 사고 지점 바로 인근 사람들의 경우에는 20%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진단됐다. 재난의 직접적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이처럼 간접체험에 따른 심리적 내상을 입는다.
하지만 재난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의 내상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재난체험자들은 극심한 심리적 후유증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2003년 미국에서 보고서가 하나 나왔다. 100대 이상의 자동차가 연쇄 충돌했던 사고에서 살아남은 부부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사고 직후 부부는 몇 분 동안 차 안에 갇혀 있었는데, 이 짧은 시간 동안 다른 차에 타고 있던 어린아이가 불에 타 죽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다. 그런데 똑같은 재난상황에 처했던 부부였지만 대응 방식은 좀 달랐다. 남편은 차량의 창문을 깨려 시도하는 등 자신과 아내를 구하려 발버둥쳤지만 아내는 순간적으로 몸이 얼어붙어 멍하니 앉아 있었던 것.
부부가 구조된 후 의료진이 사고 당시를 묘사하는 글을 읽어주며 뇌자기공명영상을 찍어보니 남편과 아내의 뇌가 달라져 있었다. 즉 남편의 뇌는 전두엽을 비롯해 다양한 부위가 활성화된 반면에 아내의 뇌는 비활성화되는 양상을 띠었던 것. 이는 사고 후 극복 과정에도 영향을 미쳐 사고 6개월 뒤 남편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치료된 반면 부인은 운영하던 사업체도 팔아야만 할 정도로 장애가 심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불의의 재난을 겪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사례는 재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하려고 노력하느냐에 따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도 치유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남편의 경우처럼 극단적 상황에 처했더라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친다면 증상 치유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부인의 경우처럼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굴복하는 무기력함이야말로 증상을 영속화하는 주범이라 할 수 있다. 무기력함을 이겨내고 적극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주변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근원적으로 치료한다.
필자가 연구를 하며 만난 한 탈북민을 통해서도 고통과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 노력의 중요성을 느낀 적이 있다. 그는 북한에서의 삶이 너무 지옥 같아 한때 북한 관련 뉴스도 피할 정도로 북한과 관련된 것은 무조건 피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괴로운 기억의 유령이 자신을 자꾸 쫓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고향을 향해 풍선을 날려 보내는 일을 시작하면서 북한이 결국엔 변화되리라는 기대가 생겼고 비로소 마음속 고통과 울분이 조금씩 풀렸다는 것이다.
이번 참사 앞에서 우리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불법과 직무유기를 자행한 사람들을 일벌백계해야 하겠지만 이것만으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국민 안전을 제대로 책임지는 국가가 되지 않는 한 국민적 상처는 진정하게 치유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 마음이 향해야 할 곳은 내가 서 있는 자리,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가 아닐까. 많은 ‘나’의 모임이 사회이니, 사회는 확장된 ‘나’이다. 결국 우리 사회가 더 안전하고 책임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은 개인적인 노력에서 시작되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치유로 돌아올 것이다.
톨스토이가 했다는 말을 되새겨본다. “해야 할 것을 하라. 모든 것은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 특히 나의 행복을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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