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공고 졸업 후 배구 선수로 제일제당에 입사한 건 1966년이었다. 무릎이 아파 3년 만에 코트를 떠나 총무과 말단 직원이 됐다. 그렇게 사회의 문을 두드린 지 48년이 흘렀어도 그는 여전히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김운용 중국 지린 성 완다(萬達) 창바이산(長白山)리조트 골프장 대표(67)다. 지난해 12월 CJ그룹 나인브릿지골프장 대표에서 물러난 뒤 올 2월 중국으로 건너간 그를 처음 맞은 건 영하 26도의 칼바람이었다. 60대 중반을 넘긴 김 대표는 옷깃을 여미며 새 길을 향한 첫발을 뗐다.
17일 골프장 그랜드오픈을 앞두고 막바지 준비에 한창이던 그를 이달 초 백두산 서파 산문(山門)에서 1시간 거리인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한국은 이미 반팔 차림이 흔해졌지만 백두산에는 아직도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이 리조트는 세계 2위의 부동산 기업인 완다그룹이 200억 위안(약 3조3000억 원)을 투자해 조성하고 있다. 3300객실을 보유한 호텔 9개, 슬로프 43면을 갖춘 스키장, 54홀 규모의 골프장 등으로 이뤄졌다.
대형 리조트의 고문 겸 골프장 최고경영자(CEO)가 된 김 대표는 “한국인으로 중국 골프 산업을 개척한다는 사명감에 어깨가 무겁다. 내가 잘해야 한국인의 중국 골프시장 진출도 활발해질 것 아니겠는가”라고 말문을 열었다.
○ “中골프 대중화” 완다그룹 삼고초려 영입
김 대표는 2000년 제주 나인브릿지 골프장 대표를 맡아 세계 100대 코스에 진입시킨 뒤 경기 여주시 해슬리 나인브릿지 골프장을 명문으로 키웠다. 평소 그는 중국 골프에 관심을 기울였다. 골프 산업의 블루오션으로 주목했기 때문이다. 중국 골프매거진에 세계 100대 골프장 탐방기를 2년 넘게 기고했다. 중국 골프장 총회에 3년 동안 옵서버로 참석하는 등 한중 골프 교류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이력을 눈여겨본 마춘예(馬春野) 리조트 총괄사장이 김 대표 영입을 위해 한국까지 찾아와 삼고초려의 정성을 쏟았다. 2년 계약에 연봉은 판공비를 포함해 5억 원 정도로 알려진 김 대표는 “중국의 골프 대중화를 앞당긴다면 한국 골프 산업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중국이 정체기에 있는 한국 골프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낯선 땅에 정착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된장국과 찰밥을 먹을 수 있다.(웃음) 중국 직원이 아침마다 주는 삶은 계란의 온기에서 따뜻한 정을 느낀다. 5시간 연속 회의가 되풀이돼 외로울 여유가 없다. 고향이 그리울 때가 있지만 내가 왜 여기에 있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자문하며 잊는다.”
잭 니클라우스가 설계한 백화 코스와 로버트 트렌트 존스가 설계한 송곡 코스로 이뤄진 이 골프장은 백자작나무로 둘러싸인 뛰어난 풍광에 맑은 날에는 백두산을 바라볼 수 있다. 김 대표는 천혜의 조건을 지닌 골프장에 한국 특유의 섬세한 운영 노하우를 접목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는 한국의 캐디 전문 교육기관 강사들을 초빙해 300명에 이르는 현지 캐디 교육에 공을 들였다. 매일 오전과 오후 6시간씩 직원 교육을 마친 뒤 야간 회의와 강의를 끝내면 오후 10시나 돼야 퇴근하는 일상을 되풀이했다. 골프채나 빼주던 역할에 그쳤던 중국 캐디들은 불과 몇 달 사이에 고객 만족과 서비스에 신경 쓸 정도로 달라졌다.
○ 고졸 CEO 신화… 샐러리맨의 롤모델
김 대표는 샐러리맨의 롤 모델로 꼽힐 만하다. 반세기 가까이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몸담으며 고졸 CEO의 신화를 이뤘다. 1995년 제일제당 영업이사에 올라 임원으로만 18년을 일했다. 그 비결을 묻자 그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의 인연을 소개했다. “1980년 경기 용인자연농원 식물과장으로 일할 때 이 회장님을 모셨다. 나무는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좋아한다는 말씀을 해주시며 정직과 성실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그 후 내 좌우명이 됐다.”
1992년 골프에 입문하면서 그는 하루에 500개의 공을 치며 집요하게 매달렸다. 한때 74타를 쳤던 수준급 실력에 CJ 임원 골프대회를 하면 ‘롱기스트 1등’을 도맡아 할 만큼 장타를 지녔다. 이런 이력으로 2000년 나인브릿지 골프장 대표가 된 뒤 20년 넘게 피워온 담배를 하루아침에 끊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면서 금연은 필수라고 생각했다. 어떤 일이든 1등이 돼야 살아남을 수 있다. 햇반 등을 팔면서 영업왕도 여러 번 했다.” 삼성의 제일주의와 CJ그룹이 강조하는 온리원 정신이 그의 몸 깊숙이 박혀 있었다.
배구 선수 시절 ‘스타’의 자리와는 거리가 멀었던 김 대표는 1970년대 후반 삼성 남녀 농구단 창단에 관여했고 1980년대에는 프로야구 삼성 관리부장 등을 지내며 스포츠 현장을 누볐다. 당시 삼성과 현대는 치열한 농구 유망주 스카우트 전쟁을 펼쳤다. 그 중심에 섰던 김 대표는 비화 몇 가지도 털어놓았다.
“삼성에서 이동균이라는 선수를 뽑기 위해 제주에 피신을 시켰는데 현대가 경비행기까지 띄워 몰래 데려갔다. 그가 울산 현대조선소 영빈관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다시 빼돌려 제일제당 씨름 선수 6명을 대동해 서울로 데려간 뒤 외부 접근을 막으려고 호텔 방문에 못까지 박았다. 이충희는 고려대 시절부터 매달 학비 명목으로 월급을 줬고, 아버지를 제일제당에 취직시키고 집도 사줬는데 당시 현대 정주영 회장님의 지시를 받은 현대의 물량 공세에 결국 놓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젠 까마득한 옛일을 회고하던 그의 눈망울은 마치 007작전을 하듯 긴박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번득였다.
손녀의 백일을 앞둔 김 대표는 “앞으론 카카오톡으로 연락해 달라”고 했다.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모습이 신선하기까지 했다. 그는 50대 후반에 늦깎이 대학생이 돼 석사 과정을 거쳐 명예박사까지 됐다. 수업에 늦지 않으려고 차 안에서 김밥과 우유를 먹어가며 학교를 다닌 그였다. “최고의 선택은 늦게나마 공부를 한 게 아닐까. 뜻이 있는 곳에 길은 있다. 도전과 창의는 늘 내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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