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희 칼럼]새끼 있는 어미는 건드리지 마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20일 03시 00분


정성희 논설위원
정성희 논설위원
세계 최저 출산율은 우리나라에서 ‘엄마 되기’에 대한 여자들의 불안과 공포를 보여준다. 아이를 안전하게, 잘 키우기 힘드니까 안 낳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저 출산율은 이기심의 발로라기보다는 처절한 모성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엄마들’은 사회적으로 가장 덜 계몽돼 있고 정치에 무관심한 집단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정치적이지 못한 엄마들을 ‘열 받게’ 하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 최근 3년 동안 엄마를 격분케 한 사건만 꼽아 봐도 대구 중학생 자살, 나주 초등생 성폭행, 울산과 칠곡 계모의 의붓딸 살해, 태안 해병대캠프 학생 사망, 경주 마우나리조트 참사 등이 있다. 세월호는 그 정점에 있다. 어린 생명이 어른의 잘못으로 희생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2011년 급우의 폭력에 시달리다 유서를 써놓고 자살한 대구 중학생은 학교폭력과 게임중독의 심각성을 드러내 보였다. 이명박 정부가 학교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박근혜 정부는 학교폭력을 4대 악(惡)으로 규정했지만 학교폭력은 엄마의 이슈로 진화하지는 못했다. 학교는 정글이었지만 엄마들은 뭉치지 못했다. 내 자식이 피해자냐, 가해자냐에 따라 엄마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반면 울산과 칠곡에서 발생한 의붓딸 살해는 엄마들의 의식 변화를 이끌어냈다. 울산의 의붓딸 살해는 단순 폭행치사로 축소됐을 뻔했으나 이웃의 엄마들은 계모에 의한 지속적 학대를 폭로하며 세상의 관심을 끌어냈다. 서연이 사건을 계기로 인터넷에선 ‘하늘로 소풍간 아이를 위한 모임’ 카페가 생겨났고 엄마들의 분노는 계모에 대한 살인죄 적용으로 이어졌다.

세월호는 엄마들의 정치의식에도 일대 전환을 가져오고 있다.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만 믿고 구명조끼를 입은 채 선실에서 대기하던 단원고 학생들이 내 딸, 내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 앞에 엄마들은 몸서리를 쳤다.

분노한 엄마들은 서연이 사건 때처럼 인터넷에만 머물지 않는다. 6·4지방선거를 앞두고 엄마들이 정치의 핵으로 등장하고 있는 거다. 자식을 지킬 수 없는 사회와 나라에 대한 분노가 이들을 합동분향소로, 거리로, 투표소로 모이게 하고 있다. 17일 서울 청계광장 집회에서도 아들딸의 손을 잡고 나온 엄마들이 눈에 띄었다. “정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가만히 있을 순 없다”는 게 순수하게 참여한 여성들의 변이었다. 사전투표 인증샷을 카카오스토리나 페이스북에 띄우고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것도 전에 없던 현상이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엄마를 분노케 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가족의 안전과 생명이 위험하다고 느낄 때다. 미국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분류하며 낮은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높은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가장 낮은 5단계는 먹고 자고 섹스를 하는 생리적 욕구, 4단계가 안전의 욕구다.

엄마는 모든 걸 견뎌도 자녀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에는 참지 못한다. 새끼가 위험하다고 느끼면 포식자에게까지 달려드는 게 암컷이다. 그래서 새끼를 데리고 있는 어미는 건드리지 않는 게 사육사의 철칙이다. 미국과 러시아에서 엄마들이 반전운동을 주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념이고 정치고 간에 자식 목숨보다 우위에 있는 가치는 없다.

40대 여성을 주축으로 한 ‘앵그리 맘’(분노한 엄마)들이 6·4지방선거 판도를 가를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엄마들은 평균 3개의 모임에 관여하고 28명의 주부와 교류한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있다. 막강한 네트워크와 뒷담화는 엄마들의 무기다. ‘앵그리 맘’의 표심이 어디로 향할지 못내 궁금한 요즘이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6·4지방선거#엄마#세월호#정치#가족#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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