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 가운데 하나가 우리 민족은 해양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특히 고구려는 오로지 만주 대륙에서 말 타고 달리는 기마국가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다. 고구려는 해양력이 막강했고, 해양활동을 최대한 활용해 성공한 나라이다. 큰 사건만 열거해도 다음과 같다.
서기 233년 겨울, 고구려 동천왕은 피란 온 오나라 사신단을 담비가죽 1000장 등의 선물과 함께 고구려 배에 태워 양자강 유역(남경)에 있는 오나라로 귀환시켰다. 그 후 몇 년 동안 동천왕과 손권은 선단(船團)을 파견하면서 무역과 정치동맹을 맺는 우호국으로 발전한다.
396년 광개토대왕은 대규모 수군을 지휘하면서 한강과 인천을 공략해 백제의 항복을 받아냈다. 장수왕 시대에 군사용 말 800필을 실은 고구려 선단이 압록강 하구 또는 대동강 하구의 항구에서 출항해 은밀하게 무려 1200km 이상 항해 끝에 상해만(지금 중국의 상해)에 도착했다. 이는 세계 항해 사상 보기 드문 사건이었다.
12세기경에 전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전설적인 바이킹의 롱십(long ship·긴 배)은 단지 군사 44명에 군마 2필만을 적재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엄청난 무역품과 군수물자를 적재한 공식 사신 선단만도 수십 차례 황해를 건너다녔다. 심지어 멀리 제주도와 중계무역을 하기도 하였다.
4세기부터는 일본열도에도 진출했고 6세기부터는 본격적으로 동해를 횡단해 왜국과 교류했다. 기록들을 종합하면 570년부터만 보더라도 멸망한 668년까지 18번이나 파견하였다. 주로 한겨울에 북서풍을 타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다가 난파되어 적지 않은 희생도 있었다. 상인들은 현지에서 무역을 하였고 승려들과 지식인들은 수도로 이동하여 문화는 물론이고 권력의 핵심부에서 정치에 직접 관여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해양력을 갖고 중요한 해로(sea lane)를 장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 대륙과 해양 장악했던 해륙국가
고구려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지리적으로 대륙과 해양을 동시에 장악했던 유일한 나라였다. 동아시아는 한반도를 가운데 두고 황해, 동중국해, 남해, 동해, 타타르 해가 둘러싸고 있으며 다시 이 바다들을 만주와 중국의 해안지구, 일본열도가 에워싸고 있다. 일종의 지중해이다.
사람들의 이동도, 외교도, 무역도, 전쟁도 바다를 통해서 가능하다. 따라서 고구려는 강대국이 되려면 대륙과 함께 해양을 동시에 장악한 해륙국가여야만 하고, 기마군단과 대선단을 동시에 운영하는 해륙시스템을 구축해야만 했다. 더구나 내륙세력인 유연 돌궐 등의 유목국가들과, 황해와 내륙을 공유한 중국 세력과 늘 패권경쟁을 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는 이 지정학적 운명을 잘 간파하고 활용하기 위해 수백 년 동안 노력을 기울였다. 5세기에 이르면 요동반도의 발해만과 요동만, 남으로는 당진만 이북인 서해중부, 동으로는 포항이 있는 동해남부 이북의 해양 영토까지 장악할 수 있었다.
고구려가 해륙국가였다는 사실은 대도시들을 보면 확인된다. 400여 년 동안 수도였던 국내성은 압록강 중류의 내륙 항구도시였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전형적인 강해(江海·강과 해양이 만나는 접점)도시이다. 1866년에는 근대 기선인 미국의 제너럴셔먼호가 평양 시내까지 진입했을 정도였다. 수군함대사령부가 있었던 요동반도 비사성은 현재의 대련항이다. 당 태종 군과 싸워 승리를 거둔 안시성도 해성이라는 지명에서 보듯 항구도시이다. 한성(서울 일대), 미추홀(인천), 국원성인 충주도 항구도시이다. 동해안에서도 두만강 하구인 책성(훈춘), 실직성(삼척), 581년에 진출한 우시군(영해)도 항구도시이다.
○ 기마군단에서 해양으로 뻗어나간 고구려 사람들
고구려는 대륙과 해양을 잇는 해륙교통망을 완성시킨 다음에 중국을 상대로 동시 등거리 외교를 벌였다. 이와 더불어 해상 봉쇄를 통해 백제 신라 가야 왜가 중국 지역과 교류하는 것을 방해하고 차단했다.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백제의 개로왕은 북위에 ‘승냥이와 이리들에게 길이 막히니…’라는 내용의 국서를 보냈을 정도였다.
이렇듯 황해와 남해, 동해를 넘나들었던 고구려는 조선술과 항해술이 뛰어났음이 분명하다. 아쉽게도 지금은 고구려 배의 크기와 우수성, 항해술을 알 수 없다. 압록강의 하류인 단동 근처에 세워진 박작성 유적에서 목선(나무배)이 출토됐지만 길이가 3.7m인 강배였다.
다행히 기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 사이에는 70여 년에 걸친 해륙 양면전이 벌어졌다. 이때 수나라는 무려 800명의 전사가 탈 수 있는 오아(五牙)라는 이름의 배를 동원하였는데, 이 전선들과 해양전을 벌여 고구려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가 동원했던 배들이 결코 작은 배는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살펴보면 동해를 건너간 배들은 50∼100명이 승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고구려 선박들은 주로 어떤 국제항로를 이용하였을까.
중국의 화북 지역으로 들어갈 때는 평양성 부두를 출항하여 대동강을 빠져나간 다음 혹도(현재 백령도)를 경유하여 대략 300km 항해하여 산동반도에 도착했다. 남방으로 갈 때는 황해를 500∼700km 길게 비켜 질러 상해만을 통과한 후에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이 항로는 북위가 심하게 견제해 사신선이 해상에서 나포된 일도 두 번 있었다.
일본열도로 갈 때는 남해동부 항로도 이용했지만 주로 동해 북부항로를 이용했다. 연해주 남부 일대와 2006년도에 중국이 조차했다고 알려진 두만강 하구의 나진항, 중국이 최근에 임대한 청진항, 원산 등이 출항지이다. 그렇게 출항한 배들은 일본열도의 니가타(新潟), 쓰루가(敦賀), 이즈모(出雲·혼슈 서부 시마네 현의 작은 도시·신라계 신을 모신 가장 오래된 신사 이즈모대사·出雲大社가 자리한 신들의 고향) 지역에 도착했다.
21세기 동아시아에서는 남쿠릴 열도,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남중국해 등 해양영토 분쟁이 일어나고 무력충돌의 가능성도 높다. 거기에 일본은 독도를 시비 삼고, 중국은 이어도를 넘보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유라시아 대륙을 축으로 삼은 신대륙주의와 동아시아로 회귀한 미국을 축으로 하는 신해양주의가 동아시아 바다에서 본격적인 세(勢)대결을 시작했다. 일본은 해군력 세계 2위, 해양영토 개념을 적용할 경우에는 세계 5위의 영토대국이며 중국은 해양대국을 선언하고 항공모함을 취역하는 등 해군력을 강화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어쩌면 바다를 무시해 온 어른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이제 우리에게 바다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내륙의 기마군단으로 시작해서 해양으로 뻗어나간 고구려 역사를 되살려 바다를 지배하는 것만이 희생자들의 한을 푸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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