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고위직을 지낸 한 법조인이 들려준 얘기다. “내 아이큐가 130이라면 그분은 170은 될 것이다. 그분의 말은 그대로 옮기면 바로 글이 된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런 말을 했다.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총기가 흐려진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은 분이 있다. 얼마나 현안 파악이 빠르고 정리를 잘하는지 적당히 넘어갈 수가 없다.” 모두 한 인물에 대한 평가다. 바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다.
지난해 10월 31일 e메일 한 통을 받았다. “그 공식의 불변성을 기필코 파괴할 각오로 일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시고 편달해 주십시오.” 발신인은 ‘김기춘’이었다. 그날 동아일보에는 필자가 쓴 ‘기춘대원군’이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야당은 당시 흥선대원군 이래 최대 막후 실세라며 김 실장을 공격했다. 어느 정권에서든 권력 2인자의 말로는 비참했다. 그래서 김 실장에게 권력의 크기에 비례해 수모를 겪는 비극의 공식을 깨뜨려 달라고 주문했다. 이 칼럼을 본 김 실장이 e메일로 자신의 각오를 전해온 것이다. 능력도 뛰어난데 겸손하기까지…. 내심 감동했다.
김 실장에 대한 청와대 내부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안검사 이미지가 워낙 강해 권위주의의 화신(化身)처럼 비치지만 실제 아랫사람과도 스스럼없이 지낸다고 한다. 지난해 8월 그가 부임한 뒤 청와대 비서실 분위기도 사뭇 달라졌다. 모든 보고서는 요점만 간략히 정리한다. 웬만한 사안은 그의 선에서 결정해 업무속도도 빨라졌다. 그가 비서실 수장을 맡은 이후 비로소 청와대가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하지만 요즘은 헷갈린다. 법조인이 아니면 명함도 못 내미는 현 정부의 인사나 김황식 전 국무총리의 서울시장 후보 차출 과정 등 물밑에서 뭔가 이뤄질 땐 어김없이 그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여권에서마저 “김 실장은 대원군이 맞다”는 말까지 들린다. 그 와중에 참사가 빚어졌다. 세월호와 함께 정부 신뢰도 성난 민심의 바닷속으로 침몰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22일 김장수 대통령국가안보실장과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의 사표를 수리했다. 국정의 키플레이어 3인방 중 2명을 내쳤다. 과감한 결단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책임 회피’로 공분을 산 김장수 실장과 간첩사건 증거 조작이란 희대의 사고를 친 남 원장의 경질은 불가피했다고 본다. 하지만 이는 세월호 참사 후폭풍의 곁가지거나 직접 관련이 없는 사안이다.
수습 과정에서 안전 시스템 붕괴의 직접적 책임을 묻는다면 3인방 중 박 대통령을 대리해 실질적으로 국정을 통솔한 김기춘 실장이 첫 번째일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알 수 없다. 김 실장을 유일한 생존자로 만들지, 아니면 청와대 개편 때 그마저 내보내 더 큰 변화를 추구할지 지켜볼 일이다. 분명한 것은 이름도 잘 모르는 장관을 아무리 많이 바꾼들 박수 칠 국민은 많지 않다는 점이다. 한 사람의 거취에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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