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불신 속 의리광고 돌풍… “우리가 남이가” 든든한 말씀
끼리끼리 의리가 관피아 늘리고 뇌물-이권 거래하는 부패 키웠다
혈연 지연 학연의 기득권 동맹
위기 닥쳐도 죽어라 개혁 막아 권력층에 法治 더 엄히 적용하라
웃는 것도 괜히 죄스러워지는 요즘, 모처럼 빵 터졌다. 의리 빼면 시체인 남자 김보성의 식혜 광고를 보면서다.
“탄산도 카페인도 색소도 없다. 우리 몸에 대한 으리(의리)”를 외치는 것부터 웃기기 시작해서 ‘전통의 맛이 담긴 항아으리(항아리)’ ‘신토부으리(신토불이)’ 같은 변종이 이어지더니 ‘마무으리(마무리)’라며 “이로써 나는 팔도(광고주)와의 으리(의리)를 지켰다. 광고주는 갑, 나는 으리니까(을이니까)!” 하는 데는 기발한 위트와 창의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복고적이고 촌스럽지만 듣기만 해도 든든해지는 말이 ‘의리’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불안과 불신이 부글대는 요즘, 문을 박차고 들어와 날 구해줄 의리남(男)을 갈구하는 심리를 광고는 정확하게 꿰뚫는다.
6·4지방선거를 코앞에 둔 정치인들이 이를 놓칠 리 없다.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는 “시민에게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의리시장이 되겠다”고 블로그에 올렸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운동 현장에선 “의리의 정치인”이라는 자랑이 빠지지 않는다.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는 의리 광고가 나오기 전인 지난달 “이제 부산은 홀로 의리를 지키는 땅이 아니라 약속 정치가 실현되는 텃밭이 돼야 한다”며 지지 정당을 바꾸라고 촉구했다.
그러고 보니 의리는 동시에 동급의 두 주인을 둘 수 없는 배타성이 있다. 영어로 loyalty로 번역되는데 기독교에서 두 신(神)을 모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광고 속 김보성도 ‘아메으리카노(아메리카노)’와 ‘에네으리기음료(에너지음료)’를 뺏으며 ‘으리집 으리음료(우리집 우리음료)’를 들이댔다.
의리엔 ①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라는 뜻과 함께 ②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리 ③남남끼리 혈족을 맺는 일이라는 뜻도 있다. 김보성은 “의리란 정의(正義)에서 출발한다”고 했지만 보통사람에게 의리는 끼리끼리의 사적(私的) 정의일 때가 더 많다. 불특정 다수에게 적용될 수 있는 신뢰나,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돼야만 하는 법치와 큰 차이가 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실감나게 전해주는 그 끈적한 연대와 ‘오야붕(후견인)-꼬붕(피후견인)’ 관계 속의 의리가 무엇보다 중요한 데가 이탈리아 마피아다. 영어 대문자(Mafia)로 쓰면 범죄조직이지만 소문자 마피아(mafia)는 친구가 잘못했고 적이 옳아도 무조건 친구 편에서 싸워주는 시칠리아 사람들의 마인드를 말한다.
그 나라에선 정직 성실 자기희생 같은 보통 공적 영역에서 중시되는 덕목을 가족과 친구의 사적 영역에만 보여준다. 정치인이나 관료는 투표나 뇌물을 주고 이권을 받는 거래가 없으면, 무시한다. 오랜 외부 침략 속에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로부터 아무 보호도 받지 못하면서 체득한 마피아 마인드다. “믿을 사람은 패밀리밖에 없다”는 비도덕적 가족주의는 세계의 연구대상이 됐다.
이런 이탈리아도 ‘신뢰’라는 사회자본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2개국 중 21위로 우리(29위)보다 높다. 관료와 마피아를 합친 관피아라는 말은 국제망신이다. 1994년 재계의 한 중진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모피아(재무부+마피아)가 산하 기관장을 70세까지 두루 섭렵하는 바람에 현역 관리들이 금융기관을 통제 못한다”고 고발해 난리가 났는데도 개혁은커녕 확장일로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고, 정치에서 친족 친지와 뭔가 주고받는 건 인간 본성이라고 했다. 그러나 국가가 패밀리끼리 이익 나눠 먹는 사기업처럼 운영된다면 대명천지 21세기에 세금 바칠 이유가 없다. 인간 본성상 지배자가 친족과 친지에게 특혜를 주는 ‘가산제’는 엄격한 제도로 눌러주지 않는 한, 두더지 게임하듯 계속 튀어나오게 돼 있다. 특히 혈연 지연 학연의 정실인사는 자유민주주의를 뿌리부터 뒤흔들 수 있어 위험하다. 국민이 정당성을 인정해줄 수 없고, 정치 경제적 위기가 닥칠 경우 이들 기득권동맹은 죽어라 개혁을 막기 때문이다.
2011년 말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의리가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라는 뜻밖의 발언을 했다. 그들만의 의리는 국민한테는 반칙이고 특권일 수 있어 ‘으리 광고’처럼 웃을 수가 없다. 차라리 “법치에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패러다임의 기반을 두겠다”는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의 말에 기대를 걸겠다. 단, 그 법치는 대통령을 포함한 모두에게 빠짐없이, 엄격하게 적용돼야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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