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문명]‘큰 어른’이 안 보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29일 03시 00분


허문명 오피니언팀장
허문명 오피니언팀장
월스트리트저널(WSJ) 서울 특파원이었던 에번 램스태드는 미국의 유력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 기고한 글(5월 12일)에서 “한국인들의 충격은 미국인들이 9·11테러 직후 겪었던 상황과 유사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나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시장 등이 사건 발생 일주일 만에 ‘일상으로 돌아가자(It’s-OK-to-move-on)’며 상처 치유에 나선 반면 한국의 경우 아직 그런 사람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 글은 국내 언론에 다수 인용 보도됐다. 온 국민이 자책과 비탄, 분노에 빠져 있을 때 그 타당성을 떠나 외국인에게 이런 지적을 듣는 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오피니언팀장을 맡고 있는 기자는 그의 기사가 국내 신문에 소개된 당일(當日) 오피니언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등 지도급 인사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왜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정치 지도자가 없는가” “대통령과 정부는 잘하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지만 답은 거의 한결같았다. “할 얘기는 있지만 내놓고 하면 맞아 죽는다. 아직 때가 아니다.”

참사 한 달 반을 넘긴 요즘에서야 민심에 약간 변화가 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한마디로 “이제 슬픔과 감정을 뛰어넘어 미래를 말하자”라는 ‘이성적(理性的)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기자는 이런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해주었으면 해서 인터뷰할 사람을 물색하기로 하고 두루 조언을 들었지만 딱 ‘이분이다’ 하는 분을 찾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러면서 어느새 우리 사회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정파나 이념을 넘어 갈 길을 제시해줄 ‘큰 어른’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사람과 생명이 모든 가치 중에서 제일간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살아왔더라면, 그리고 누구보다도 우리 정치인과 경제인들에게 이런 인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돈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에 앞서 있었더라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들어도 가슴에 새겨지는 이 말은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1995년 7월 16일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를 위한 미사 강론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에게는 큰 어른이자 영적지도자로 존경받는 김수환 추기경이 계셨다. 성철 큰스님도 계셨고 학계 언론계에도 여러 어른이 계셨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 어려울 때 기대고 슬플 때 위로받고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영적 지도자들이 안 보인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다 보니 중국 고사를 인용하거나 영어를 섞어가며 미국, 유럽을 말하는 ‘에헴’ 하는 ‘깡통들’(김지하 시인의 표현)이 지성인으로 행세하기도 한다. 지식인들도 좌파 우파 딱지가 붙어 네 편 내 편으로 갈린 지 오래고, 인터넷에선 인신비방 유언비어 막말이 횡행하고, 국회 청문회에선 ‘신상 털기’로 잘못이 있으면 반성을 해도 기회를 봉쇄하는 관행이 자리 잡았다. 어디까지는 되고 어디까지는 안 되는 기준조차 합의된 바 없이, 당시의 사회적 규범이나 현실이 고려되지 않는 마녀사냥식 단죄도 일상이 됐다.

그 결과 사회 전체적으로 지혜나 지성이 얇아지고 각박해졌다. 국민들과 시대가 가야 할 길을 크게 짚어 내는 ‘큰 시야’와 진정한 반성과 치유와 희망과 미래에 대한 ‘큰 목소리’가 없어졌다. 그 대신 “모든 문제는 대통령이 책임져야 하고 대통령이 해결해야 한다”는 ‘작은 목소리’들만 들려올 뿐이다. 어쩌면 먼저 성찰하고 개혁해야 할 것은 제도나 관행이 아니고 지성을 밀어낸 우리 마음속 야수성, 반성보다는 손가락질, 사람보다 돈을 더 중시했던 물질주의가 아니었는지 세월호 참사 40여 일이 지난 시점에서 드는 생각이다.

허문명 오피니언팀장 angelhuh@donga.com
#정치 지도자#슬픔#세월호#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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