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우야, 네가 오랜만에 전화를 한 건 한신대 학생들이 서울 청계광장에서 삭발단식을 시작하던 날이었다. “이게 나라입니까”라며 울분을 토하듯 말하는 네 목소리에 조금은 눈물이 섞여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기보다 시골로 가서 마을 만들기에 도전해 보겠다던 네 심성을 알기에, 나는 너의 분노 어린 격정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네 말대로 이건 단순한 해양사고가 아니라 사회적 부조리와 부패가 집약된 살인사건인지 모른다. 먼바다도 아닌 연안에서, 물이 차오르는 선실의 유리창을 통해 살려달라고 절규하던 어린 꽃잎들을 수장시켰으니 그 잔상이 떠나지 않는다. 거기에 우리의 자화상이 다 비친다. 무책임한 선장, 예수의 이름을 팔아 돈을 버는 종교, 이익이라면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사업가, 공직을 약탈의 기회로 삼는 공직자.
세월호의 침몰을 ‘공공성’의 침몰로 규정하는 너에게 나는 할 말이 없다. 내가 공공성에 대해 강의할 때, 그게 사회를 받쳐주는 기둥이라고 토론한 적이 있었지. 그때는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원전 비리가 연이어 터지던 때였다. 그 후 국정원의 선거 개입 의혹과 간첩 조작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국가기관이 공공성을 스스로 파괴했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지도자들을 너는 이해할 수 없다고도 했다. 그 조직의 수장은 엄벌을 받지 않다가 세월호가 가라앉은 후 ‘사표’를 냈다. 조작된 증거를 법정에 제출했던 검사들은 ‘품위 손상’으로 몇 달 월급을 덜 받거나 한 달 쉬는 것으로 한단다.
수업시간에 우리가 토론했던 내용을 기억하니? 우리 조상들이 예(禮)와 치(恥)로 사회를 떠받치고 살았다면, 이제는 사회적 공공성으로 나라를 떠받쳐야 하는 거라던 거 말이다. 그게 무너지면 지도층은 썩고, 민초들은 예절을 잃는 법이다. 그 부실 속에서는 사고와 재난이 끊이지 않고, 원망과 보복이 횡행하게 되는 거지.
현우야, 전화를 끊으며 네가 그랬지. 결국 우리 사회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다고. 선장이 승객을 버리고 도망친 것도 개인의 우발적 행동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맥락의 발현일 뿐이라고. 네 말대로 임란(壬亂)이 터졌을 때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가고, 6·25전쟁이 터지자 이틀 만에 대통령이 대전으로 몰래 빠져나가 서울 사수를 다짐하는 거짓 녹음을 하고, 세월호 선장은 학생들을 버리고 제일 먼저 도망친 걸 우리가 보았다. 그래서 모두가 ‘우리나라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다’고 말을 하기도 한다.
나도 영국의 윈저성에 갔을 때 바로 옆 이튼 칼리지에 들러 그런 감상에 젖기도 했다. 그 학교 교회에는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졸업생들 이름을 새겨놓았는데, 제1차 세계대전 1157명, 2차대전 748명이 새겨져 있었다. 10년 정도의 졸업생이 모두 순국한 셈이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까지 19명의 총리를 배출한 고등학교의 전사자 명단이었다.
그러나, 현우야. 낙심할 필요는 없다. 다음 주 나는 경북 안동에 다녀올 생각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안동의 최고 명문가로 한반도에서 가장 화려한 민가에서 태어났던 선생은 일제가 나라를 강점하자 모든 걸 던지셨다. 1911년 설을 쇠고 새벽 사당에 나아가 하직 인사를 올린 후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었다. 뼛속까지 유학을 익혔던 선비로서 말이다. 대대로 내려온 토지를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 그는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마을 사람들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었다. 살을 에는 추위에 2500리 길을 떠난 석주는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거기에 목숨을 바쳤다. 석주를 시작으로 그 집안 3대에 걸쳐, 아홉 분의 독립운동가가 임청각(석주 생가)에서 나왔다.
나는 10년 전 석주 선생을 알게 된 후 ‘이 나라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다’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상룡 선생뿐이겠니! 현우야, 이제 6월이다. 5월을 아프게 보냈으니, 힘을 내자. 그게 너와 나의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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