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몸의 반을 나누어 주고 상처를 재로 다스리며 땅에 묻히지 않고 어떻게 주렁주렁 열리는 감자가 될 수 있을까? 반쪽의 감자로 나누어져서야 씨감자가 되는 달콤한 상처 티눈 몇 개를 두고 온몸으로 아픔을 다스리며 슬픔의 눈을 옆으로 옮겨 붙으며 서로에게 깊은 눈짓으로 이어지는 사랑 나는 왜 씨감자가 되지 못했을까 나누어야 밑드는 행복을 왜 알고도 노래하지 않았을까? 감자를 캐면서 이미 감자가 아닌 씨감자의 가벼워진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감자는 감자를 되심어야 또다시 감자를 생산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닌 영양번식작물의 대표적 작물이다.’ 그래서 그해 소출 감자 중 10분의 1을 씨감자로 남긴다고 한다. 어차피 식용이 되는 감자 입장에서는 씨감자가 되는 게 억울한 일은 아닐 테다. 땅에서 벗어나 하나의 완성체로 비로소 느긋이 말라가며 쉬고 있는데, 칼로 쪼개져 도로 땅에 묻히고 상처 입은 몸으로 열을 뿜으며 다시 생을 시작하는 건 틀림없이 고통스러울 테지만, 희열이기도 할 테다. 씨감자로 말미암은 ‘주렁주렁 열리는 감자’는 씨감자의 보람이기도 하고 농부의 보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땅에 심겨진 씨감자는 결국 어떻게 됐을까. 주렁주렁 달린 감자를 캐낸 뒤 무심히 뽑아버리는 감자 줄기 끝의, 까마득히 잊힌 ‘이미 감자가 아닌/씨감자의 가벼워진 죽음’을 화자는 기린다. 감자 작농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은 씨감자의 말로를 무화에서 건져내는 시인의 눈이며 마음이다.
‘제 몸의 반을 나누어 주고/상처를 재로 다스리며/땅에 묻힌’ 씨감자는 후세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표상인데, 부모 된 사람과 학교 선생님이 떠오른다. 시인 정재영은 고등학교 교사란다. ‘티눈 몇 개를 두고/온몸으로 아픔을 다스리며’라는 시구에서 갖게 되는, 왜 ‘씨눈’이 아니고 ‘티눈’일까 하는 의문이 해소된다. 어쩌면 그는 발바닥에 티눈이 생기도록 가출한 제자를 찾아다니느라 헤맸는지 모른다. 빗나간 제자 때문에 아픈 마음으로 고생해도 보람 없는, 사제 간의 사랑과 존경이 실종된 현실에 맥이 빠졌을 수도 있다. ‘나는 왜 씨감자가 되지 못했을까’, 더 무작정 사랑하고 헌신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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