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1953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서울 배재고 2학년에 다니던 17세 까까머리 소년은 과외 활동으로 농구를 선택했다. “농구는 내가 좋아하던 수학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농구 전술은 기하학 같고 공식을 풀어가는 과정처럼 보였다. 키 큰 우등생만 가입할 수 있다는 자부심도 컸다.”
그렇게 시작된 농구와의 인연이 60년 넘는 세월을 관통할 줄 누가 알았을까. 7월 1일부터 3년 임기를 시작하는 김영기 한국농구연맹(KBL) 신임 총재(78) 얘기다. 지난달 23일 KBL 10개 팀 구단주의 의결 기관인 총회에서 총재로 선출된 그를 지난주 서울 종로구의 한 순두부 식당에서 만났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일찍 나타난 김 총재는 자신보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기자를 향해 “김 형이 한발 빨랐다”며 웃었다.
김 총재는 한국 농구의 살아 있는 역사다. 스타 선수로 이름을 날리며 올림픽에 두 차례 출전했다. 1969년 33세로 남자 농구 대표팀 감독을 맡아 한국의 사상 첫 아시아선수권 우승과 1970년 방콕 아시아경기 금메달을 이끌었다. 1970년대 기업은행 지점장과 신용보증기금 전무 등을 거쳐 신보투자 대표를 지내면서도 농구와의 끈을 유지했다. 1980년대 대한체육회 부회장으로 서울올림픽 유치 활동에 뛰어든 뒤 대한농구협회 부회장, KBL 전무 부회장 총재 등을 역임했다. KBL 고문으로 있던 그는 이번에 KBL 총재 제안을 받고는 처음엔 고사했다. “나이가 몇인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통화가 연결됐던 그의 휴대전화에서 ‘지금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반복되던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래도 그를 차기 총재 후보로 천거한 한선교 현 KBL 총재의 권유는 집요했다. “한 총재와는 막역한 사이다. 내가 휴대전화를 받지 않으니 한밤에 집으로 전화를 했다. 내 아내에게 미안하다고까지 하더라.” 김 총재의 마음을 돌린 건 정작 따로 있었다. 그에게는 정기적으로 골프를 치는 고려대 법학과 55학번 동기 모임이 있다.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 박수길 전 유엔대사, 박종석 전 한화 부회장 등이 주요 멤버다. “친구들이 그러더라. 그 나이에 누가 불러 주냐. 부럽다. 구단주들이 다 널 인정해 준 거 아니냐.” 피하지 말라는 격려에 마음을 돌렸다.
1990년대 중반 KBL 창립과 프로농구 출범을 주도한 건 바로 김 총재였다. 1997년 시작된 프로농구가 뜨거운 인기로 단기간에 자리를 잡고 서울 강남 한복판에 수백억 원 가치의 KBL 사옥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KBL 총재였던 2004년 그는 판정 시비로 몰수 게임 사태가 일어난 뒤 책임을 통감한다며 홀연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10년 만에 KBL 총재로 컴백한 그의 어깨는 무겁다. “언제부터인가 코트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 나쁜 플레이가 좋은 플레이를 몰아내면서 팬들의 외면을 받게 된 것이다. 비정상의 정상화.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평소 김 총재는 빠른 농구를 지향하고 고의 파울과 할리우드 액션 같은 비신사적인 플레이는 지양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그가 그려 나갈 코트의 밑그림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얼마 전 프로농구 시상식에 갔더니 심판상 수상자가 야유를 듣더라. 신뢰받는 심판이 중요한데 너무 안타까웠다. 지도자도 명품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보다 경기 시간이 8분 더 긴 미국프로농구(NBA)의 평균 득점은 100∼105점이다. 한국도 경기 시간에 비례해 NBA의 83.3%인 85점 이상은 나와야 하는데 70점 넘기도 힘들다. 이래선 안 된다.”
구체적인 데이터까지 짚어가며 열변을 토하는 모습에서 세월을 거스르는 열의가 느껴졌다. 비결을 물었더니 “뭔가 구체적인 목표가 있어야 심신이 건강해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시내에 약속이 있으면 늘 전철을 타고 걸어 다닌다. 하루에 8000보 이상 걷는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오후 5시 전후로 저녁을 먹는다.” 그러면서 김 총재는 수첩을 꺼내 보여줬다. 첫 장부터 끝까지 검은색 볼펜으로 깨알같이 적은 영어 표현이 담겨 있었다. “늘 다니면서 반복해 읽고 외운다. 1주일에 영문 추리소설을 한 권씩 읽고 있다.” 그는 2년 전 골퍼라면 누구나 동경한다는 에이지 슛(자신의 나이와 같거나 적은 스코어를 기록)을 달성했다. 만 76세 때 76타를 친 것이다. 골프 실력뿐 아니라 고령에도 탄탄한 체력을 지녀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김 총재는 선수 시절 180cm의 키에도 덩크슛을 할 만큼 타고난 점프력으로 유명했다. 코트 내·외곽을 휘젓고 다니며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원조 오빠이기도 하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출전했을 때 한국에서 팬레터가 하루 600통 넘게 선수촌으로 왔다. 당시 내가 약혼했을 때였는데 약혼녀 편지를 찾느라 진땀 흘렸다. 허허.”
농구 선수, 지도자, 금융인, 스포츠 행정가로 연이어 성공의 길을 걸었던 김 총재는 “뭘 하든 스포츠맨십만큼은 지켰다. 규칙을 준수하고 남을 배려하는 정신이다. 직장에 출근할 때도 경기하러 가는 마음가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5년 밖에 안 한 농구 감독이 가장 힘들었다. 선수 앞에서 모범을 보이고 감정을 조절하면서 선수들의 재주를 최대한 살려주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던 김 총재 곁에 2시간 넘게 있다 보니 북적거리던 식당은 어느새 한산해져 손님은 한 테이블만 남았다. 점심을 들던 식당 아주머니들의 시선도 느껴졌다. “차 한잔하면서 마저 하지.” 김 총재는 맥박수가 180까지 치솟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냉철한 판단으로 볼을 넣고 상대를 막아야 하는 게 농구의 매력이라고 했다. 고통 끝에 희열을 맛보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는 그의 열정은 10대 시절만큼이나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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