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교수의 고구려 이야기]<12>바다를 제패한 아시아의 바이킹, 발해인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3일 03시 00분


발해 선단들이 고국을 향해 출항했던 일본의 항구인 이시카와 현 노토 반도의 후쿠우라 항. 아시아의 바다를 제패한 발해의 융성함을 엿볼 수 있다. 윤명철 교수 제공
발해 선단들이 고국을 향해 출항했던 일본의 항구인 이시카와 현 노토 반도의 후쿠우라 항. 아시아의 바다를 제패한 발해의 융성함을 엿볼 수 있다. 윤명철 교수 제공
윤명철 동국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교수
중국은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발해는 당 왕조가 관할한 소수민족 지방정권(渤海是我國唐王朝轄屬的少數民族地方政權)’이라고 했다. 심지어 초기 국호를 ‘말갈국’이라고 했다. 역사를 뒤엎는 궤변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역사서 속일본기(續日本紀)의 기록을 보자. ‘고제덕 등 8명 고려의 사절들이 출우국(出羽國·현재 일본 혼슈의 아키타 지방)에 도착했다. 성무천황이 영접사를 보내 모셔다가 극진히 대접하고, 국서를 주었으며 이후 정중히 돌려보냈다.’

때는 서기 727년, 발해 2대 임금인 무왕(武王)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본문 첫머리에 나온 고려는 발해를 가리킨다.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칭했다. 국서에는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는 선언이 기록되어 있었다. 일본국도 발해에 파견하는 사신을 ‘견고려사(遣高麗使)’라 불렀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발해의 첫 국호는 진(振, 震)국이면서 동시에 ‘고려국’이었을 것이다.

○ 日에 공식사절만 34회 파견

발해는 698년부터 926년까지 228년 동안 존속했으며 해동성국(海東盛國·바다 동쪽의 전성기를 맞이한 나라라는 뜻)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들은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를 계승하면서 부활했다. 자의식이 강해서 ‘하늘의 자손’임을 표방했고, 임금은 신라와 달리 철저하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발해는 강대국이 되기 위해 해양력을 강화시켰다. 732년 9월에 발해의 해륙군이 당나라를 침공한 기록이 있다. 이때 장문휴(張文休)는 수백 척의 배를 거느리고 압록강 하구의 박작성(단둥 시)을 떠났다. 요동반도 해안에 이르러 은밀하게 항해하다 산동반도의 등주항에 상륙했는데 전광석화 같은 상륙작전으로 자사(刺史)인 위준(韋俊)을 살해하고, 최대의 해군기지였던 등주성을 점령했다. 그 후 발해는 황해 북부 항로를 이용하면서 제나라(고구려 유민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산동반도를 장악한 후 세운 나라)와 말 무역을 벌였다.

발해인들은 고구려인들처럼 돛단배를 타고 동해를 건너 일본을 다녔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220여 년 동안에 공식적인 사절만 무려 34회 파견했고, 기적 같은 일이지만 746년에는 1100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건너가기도 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8세기, 동아시아는 21세기처럼 갈등과 충돌의 냉전 시기였다. 발해는 신라와 국경 분쟁을 일으켰고, 일본은 신라의 일본열도 상륙을 두려워하면서 ‘신라정토론’을 선언하고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를 했다. 신라 또한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통일신라를 남북에서 압박하던 두 나라는 자연스럽게 ‘발일(渤日)동맹’을 발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동해를 건너 사신들이 오고 갔다. 특히 일본은 발해의 도움을 절실히 원했다.

그러다 냉전이 끝나면서 무역과 문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100명이 넘는 인원이 승선한 2∼4척의 선단들이 쉴 새 없이 동해를 건넜다. 일부는 현지에 남아 곳곳에 세워진 객관이나 객원에 몇 달씩 머무르면서 장사를 하기도 했다. 일종의 보세구역이었던 셈이다.

발해인들은 담비가죽, 호랑이가죽, 표범가죽, 말곰가죽, 명주나 철, 동 같은 고도의 기술 상품과 꿀, 인삼, 다시마 같은 토산품을 수출했다. 해표피(바다표범가죽), 해상어 등으로 만든 수공업 제품은 물론이고, 대모배(玳瑁杯·동남아산 붉은 바다거북 껍데기로 만든 술잔) 등 남방 물품까지도 중계무역을 했다. 물론 귀국할 때는 수은, 면 등을 사갖고 와서 팔았다. 871년에 양성규가 사신으로 왔을 때에는 일본 왕정에서 지불한 돈만 40만 냥이었으니 귀족이나 관리, 일반인들이 지불한 금액까지 합하면 엄청났다.

무역 역조 현상은 일본 국가 재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래서 발해산 모피 착용에 대한 규제를 발동시키기도 했고 사신들은 12년마다 한 번씩 오도록 제한했으며 1회 인원수도 105명으로 묶었다.

○ 동아시아 최초 동해무역권 성립

발해인들은 동아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본격적인 동해무역권을 성립시켰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초기에는 소규모 인원이었지만 점차 100명이 넘고, 359명(779년)이 온 적도 있었다. 739년에는 전원이 죽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고 776년에는 187명 가운데에서 46명만 살아 돌아왔으며 786년에는 표류하다가 65명 가운데 12명은 원주민에게 죽고 나머지 53명만 생존한 일도 있었다. 그 후로도 이런 비극은 되풀이됐다.

일본 학자들은 우리 역사와 문화를 축소하기 위해 그동안 발해의 배가 작고 난파 사례가 많은 점을 들며 발해의 조선술과 항해술이 뒤떨어졌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도 발해의 역사와 과학기술을 깊이 연구함이 없이 그들의 주장을 추종해 왔다는 점이다.

발해인들은 2, 3번의 예외를 두고는 대부분 음력 10월에서 음력 1월 사이에 동해를 건넜다. 뒷바람인 북서풍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겨울의 동해는 수온이 낮고, 폭풍이 몰아칠 땐 풍속이 초속 20m 이상이며, 파도는 5m가 넘어 항해가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107만 km²에 달하는 망망대해라서 고도의 천문항법(태양, 달, 별 등과 같은 천체의 고도와 방위를 관측하여 선박의 위치 및 항로를 측정하는 항법)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일본은 동해를 건널 엄두조차 못 냈다. 200여 년 동안에 겨우 9회, 그것도 답례사라는 명목으로 함께 갔다. 심지어 당나라에 파견한 사신들도 때로는 발해 배를 얻어 타고 다녔다. 물론 사신단에는 고려씨(高麗氏)를 비롯해 항해사 등 고구려 유민들이 다수 타고 있었다.

○ 모험심-도전정신 뛰어난 고구려의 후예

발해는 우리 역사에서 잊혀진 나라, 실체가 불분명한 안갯속에 싸인 나라로 취급되어 왔다. 하지만 총 228년을 존속한 그들은 무역과 경영 능력이 뛰어났으며, 모험심과 도전정신, 비극적인 상황에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갖춘, 명실상부한 고구려의 후속 국가였다. 또 목숨을 내걸고 험한 바닷길을 건너다니던 아시아의 바이킹이었다.

그들은 함경도 해안, 연해주의 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토크, 나홋카 등의 해안을 출항하여 일본 열도 북쪽의 아키타 현에서 남쪽 규슈 지방에 이르기까지 모든 항구에 도착했고 아무르 강(흑룡강) 하구나 주변의 항구들을 출항하여 타타르 해협을 넘어 사할린과 홋카이도(北海道)에도 도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호츠크 해 어느 마을에서 발해인들의 자취가 발견될 날을 고대해본다.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동해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경제 중심 지대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옛날 발해 영토인 연해주를 놓고 갈등을 벌이고, 쿠릴 열도에서는 러시아와 일본이 영토 분쟁 중이다. 그리고 중국은 두만강 하구인 나진선봉을 통해서 동해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미래를 향한 국가 전략의 재설계가 절실한 시대다. 그 무엇보다도 동해를 누비고 일본 열도로 세력을 확장했던 발해의 웅장한 스케일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윤명철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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