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희균]역경 스펙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3일 03시 00분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고난과 역경을 딛고…. 힘든 시련에도 불구하고….

위인전이나 인물 기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표현들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이런 표현이 더 자주 쓰인 곳은 따로 있다. 바로 대학 입시의 자기소개서다. 지난 정부에서 입학사정관 전형을 도입한 것이 계기다.

도입 취지는 좋았지만 현실은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이른바 ‘스펙’ 경쟁에 불이 붙었다. 경시대회 수상이나 봉사활동처럼 쓸 만한 항목이 거기서 거기이다 보니 조금이라도 더 눈에 띄려는 경쟁이 심해졌다. 일반고 학생이 과학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을 쓰거나, 봉사를 했다고 하려면 아프리카 오지 정도는 가줘야 생색이 날 정도였다. 한 대학 입학처장은 “민간인이 갈 수 없는 지역에서 환경보호활동을 했다고 쓴 자기소개서를 들고 무슨 ‘백’으로 들어갔는지, 실정법 위반은 아닌지 한참 고민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학부모에 의해 관리되는 스펙 경쟁이 과열되면서 급기야 사교육 판에서는 ‘역경 스펙’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기소개서가 눈에 띄려면 어려움을 이겨낸 감동적인 스토리가 필수라는 얘기였다. 극성스러운 부모들 사이에서는 위장이혼이라도 하거나, 아이 아빠가 한 번쯤 사업을 망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입학사정관 전형이 학생부 종합전형으로 축소되면서 이런 분위기는 한풀 꺾이는 기세다. 평탄하게 살아온 아이들이 대학 입시용 역경을 꾸며내는 일은 줄어드는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와 새삼스럽게 역경 스펙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진짜 역경에 처한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 역경에 대한 관심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바로 세월호 참사의 한복판에 놓인 단원고 학생들이다.

사고를 당한 2학년 학생들이 학교로 복귀하긴 했지만 이들에게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기대하는 것은 가혹하다. 당초 5월 7일로 예정됐던 중간고사는 오늘부터 사흘간 진행되고 있다. 그나마 1, 3학년들만 시험을 볼 뿐, 2학년은 중간고사에 대한 기약도 없다.

대학 수시모집에서 내신의 비중이 커지면서 중간, 기말고사를 단 한 번만 삐끗 실수해도 입시에 타격이 크다. 엄청난 심신의 충격, 어그러진 교육과정, 엉망이 된 시험은 단원고 학생들을 이중 삼중의 역경에 몰아넣고 있다. 단원고 회복지원단의 한 관계자는 “고3 아이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의지하며 시험을 치르고 있는데 너무 딱하다”고 전했다.

수도권 일부 대학 입학처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단원고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조금씩 흘러나온다. 하지만 이미 올해 입시 요강은 확정됐고, 현행 입시 규정상 이들을 고려할 방법이 없어 안타까운 상황이다.

적어도 직접 사고를 당한 2학년을 위해서는 정책적 배려를 해달라는 요구가 나올 법도 하건만 정작 당사자들은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다. 단원고의 한 관계자는 “이 아이들이 대학에 갈 때까지 여론의 관심이 남아 있을지 걱정이 된다. 막상 이해관계가 갈리고 형평성 얘기가 나오면 쉬운 문제가 아닐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유례없는 역경에 처한 아이들은 대학 입시라는 일생의 큰 관문에서 또 한 번 위기에 놓일 것이다. 규정상 안 된다고만 하기에는 불이익이 너무 크다. 학생부 종합전형을 통한 가점이든, 정원 외 모집을 활용한 특례입학이든 가능한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만들어낸 역경 스펙으로 득을 보기는커녕, 날벼락처럼 맞은 역경 때문에 적어도 불이익을 입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보듬을 것인지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foryou@donga.com
#스펙#세월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