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일벌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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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일벌레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일중독 문화 바꿔 고용률 70% 달성’. 올 들어 자주 접하는 기사 제목이다. 처음엔, 난데없이 무슨 소린가 했다. 압축성장의 벨트 위에 올라서서 ‘더 빨리, 더 열심히’를 외쳐온 우리의 모습과 영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어쨌거나 ‘일중독’에서 벗어나자니, 일벌레에게 저녁을 돌려준다니, 오랜만에 접하는 신선한 소식이다.

그러고 보니 ‘일벌레’라는 말은 요즘 ‘워커홀릭(workaholic·일중독자)’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가는 신세다. ‘월화수목금금금은 기본, 하루 3시간 이상 안 자는 워커홀릭’ ‘체리 좋아한 조지 워싱턴, 적극적이고 워커홀릭’ 같은 표현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나는 워커홀릭’이라는, 큼지막한 제목으로도 떡하니 나타나기도 한다. 본문에 ‘일중독자’를 병기한 것에 고마워해야 할 지경이다.

‘워커홀릭.’ 몇 년 전만 해도 생소했고, 10년 전쯤에는 영어사전에도 없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푸드홀릭(foodaholic), 알코홀릭(alcoholic)과 함께 당당히 올라 있다. 아예 ‘-aholic’이 ‘중독자’ ‘탐닉자’를 뜻하는 접미사로 자리를 잡았다. 그 바람에 웹홀릭, 비타민홀릭, 댄스홀릭, 커피홀릭 등 얼토당토않은 낱말이 줄줄이 생겨났다. 우리는 이미 제멋대로 말을 만들어내는 ‘워드홀릭’에 빠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워커홀릭과 달리 언중의 우리말 사랑으로 태어난 대표적 낱말이 ‘도우미’다. 1993년 대전 엑스포 때 첫선을 보였다. 그 역시 출발은 만만찮았다. 도우미와 지킴이는 낱말의 됨됨이가 똑같은 경우인데 말의 뿌리를 밝혀 쓰는 방법은 다르다. 그래서 ‘도움이’로 써야 한다는 주장이 한때 세를 얻기도 했다. 1999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도우미’가 표제어로 오름으로써 논쟁은 일단락됐다. 이후 청소년 지킴이, 독도 알림이, 아동 돌보미 등 친근한 낱말들이 생겨나 우리말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새로운 낱말은 조어법의 잣대로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이쯤에서 웃자라버린 워커홀릭에 밀려 비실거리는 ‘일벌레’에게 제자리를 찾아주는 건 어떨지. 그 시작과 끝은 역시 언중의 ‘우리말 사랑’이다. 때마침, 동아일보와 고용노동부가 일중독에 빠진 우리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근로문화 개선’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손진호 어문기자
#일벌레#일중독#워커홀릭#도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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