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이나 사별(死別)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사람들은 ‘망각(忘却)’을 꼽는다.
아픈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망각은 신의 선물’이라는 말까지 있을까. 특히나 요즘처럼 정보가 쏟아지는 세상에서는 적당한 망각이 경쟁력이 될 수 있다. 머릿속을 잘 비워야 돈이 되는 좋은 정보를 채워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점에 가면 이런 망각의 능력을 예찬하는 책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망각이 항상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망각이 더해져 집단망각으로 발전할 경우 위험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세월호 침몰은 바로 집단망각이 초래한 참사다. 한국 사회는 1993년 292명이 숨진 서해훼리호 침몰을 겪고서도 깡그리 잊고 있다가 판박이 같은 사고를 당했다. 기억은 몇 명 안 되는 생존자와 유족들에게 남겨진 몫이었다. 집단망각의 대가는 고작 추모비(또는 추모공원)와 백서였다.
집단망각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서해훼리호 사고 이후에도 한강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화성 씨랜드 화재, 대구지하철 방화 등 참사가 이어졌다. 참사의 기억은 짧게는 2, 3개월에서 길어야 1, 2년을 가지 못했다. 그저 기념일 챙기듯 5주기 10주기 때 참사의 옛 기억을 떠올리며 애써 망각을 부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망각은 습관을 넘어 ‘불치의 병’으로 자리 잡았다.
집단망각이 가져오는 폐해는 또 있다. 선거 때만 국민을 찾는 한국의 정치다. 국민들은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의 공약(公約)을 놓고 갑론을박한다. 그러나 몇 년 뒤 이것이 공약(空約)으로 바뀌어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파렴치범 수준의 잘못이 아니라면 어지간한 정치인의 실수는 기억 속에 남겨놓지 않는다. 많은 국민이 한국의 후진적 정치문화를 비판하지만 이처럼 유권자들의 망각 탓도 크다. 기억해야 올바른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4일 치러졌다. 세월호 참사의 여파로 후보들은 앞다퉈 안전공약을 내걸었다. 공약을 지키는 것은 당선자들의 의무이지만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국민들의 몫이다.
지금 세월호 희생자 유족과 실종자 가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망각이다. 한 실종자 가족은 “선거 같은 게 없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월드컵, 인천아시아경기대회도 열리는데 세월호가 잊혀지면 어떡하냐”며 하소연했다. 이들에게 세월호가 잊혀진다는 것은 단순히 관심이 옅어지는 것이 아니다. 희생된 가족과 자신들의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여긴다. 그동안 수많은 참사 뒤 우리 사회는 집단망각을 선택했지만 생존자와 유족들은 설 곳을 잃고 스스로를 ‘기억의 방’에 고립시킨 채 지내왔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의 망각문화를 다시 한 번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 또다시 길고 긴 망각의 시간을 되풀이할지는 우리 모두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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