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유병언과 메릴린 먼로

유병언의 현상수배 전단에 게재된 사진들(왼쪽)과 앤디 워홀이 메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연속 배열한 작품.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도주를 둘러싼 작금의 상황은 ‘초현실적’으로까지 보인다. 유.병.언. 그는 적어도 미디어를 통해서는 지금 전국 각지에 있는 동시에,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얼마 전 유 전 회장에 대한 현상수배 전단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메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연속 배열한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대표작과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정장한 유병언, 죄수복 입은 유병언, 검은 머리 유병언, 흰 머리 유병언, 회색 머리 유병언, 미소 띤 유병언, 침묵하는 유병언, 강연하는 유병언, 정면의 유병언, 측면의 유병언…. 수많은 모습인 동시에 알고 보면 하나인 그는 분명 실재(實在)하는 동시에 여전히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실재하지 않는 존재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섹시스타 먼로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복제해 냄으로써 가상(假像)이 어느새 원본을 능가하는 힘과 존재감을 가지게 된 현실을 설파한 워홀의 작품세계를 고스란히 떠오르게 만든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유 전 회장의 실제 모습을 본 적이 없지만, 그가 지금 우리 옆집에 은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 속에 복제된 수많은 유병언 중 진짜 그는 누구인가. 그는 지금 한 곳에 존재하는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하며, 어쩌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유 전 회장의 ‘핵심 조력자’로 알려진 ‘신엄마’ ‘김엄마’ 등 이른바 ‘두 엄마’를 체포하기 위해 11일 금수원에 경찰이 진입하는 모습도 공상과학(SF)영화의 전설로 불리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유 전 회장의 도피를 지휘했다고 알려진 핵심 인물을 검거한 후에도 ‘신엄마’ ‘김엄마’ 등이 속속 등장하는 상황. 이는 인류를 지배하는 가상세계에 맞서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구원자 ‘네오’(키아누 리브스)가 인류를 위협하는 가상세계의 악당 ‘스미스’를 제아무리 무찔러도 스미스가 자기복제를 계속하며 또 다른 스미스들을 개떼처럼 만들어내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스미스’라는 매우 흔한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그가 복제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영화가 암시했듯이, ‘엄마’라는 이름도 ‘박엄마’ ‘이엄마’ ‘왕엄마’ ‘정엄마’ ‘한엄마’ ‘고엄마’ ‘곽엄마’ ‘배엄마’ ‘진엄마’ ‘홍엄마’ ‘독고엄마’ ‘황보엄마’로 얼마든지 증식이 가능한 것이다.

유 전 회장을 돕는 인물 중엔 유독 여성이 많고, 이들 여성의 연령대도 30대부터 60대까지 폭넓다는 점을 두고 일부 언론은 이들 여성과 유 전 회장의 관계를 추측하는 보도를 내놓고 있다. 진실은 규명되지 않았으나, 이들 여성이 검경에 스스로 붙잡힐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유 전 회장의 도피를 돕는 것으로 보아 여인들은 유 전 회장에 대해 남다른 유대감을 느끼는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 대목은 최근 국내 개봉된 미국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사려 깊은 신작 ‘그녀(Her)’를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 속 남자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는 고독감을 참지 못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인공지능 운영체제(OS)인 ‘사만다’(목소리 연기는 여배우 스칼릿 조핸슨)에 접속한다. 하루 24시간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만다로 인해 행복을 되찾은 남자는 마침내 사만다를 열렬히 사모하게 되는데…. 그러나 남자는 큰 배신감과 공허함에 빠지고 만다. 알고 봤더니 운영체제인 사만다는 자신뿐 아니라 641명의 남자와 사랑하고 있었고, 나와 대화하는 동시에 8000명의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 ‘나만의 그녀’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낙망한 남자에게 사만다는 이런 기가 막힌 대사로 타이른다.

“나는 당신 것이면서 동시에 당신 것이 아니에요. 난 더 넓게 사랑할수록 더 많이 사랑하게 돼요. 더 많은 사람과 사랑할수록 당신을 더욱 사랑하게 돼요.”

아! 정말 말 안 되면서도 이렇게 말 되는 말이 또 있을까. 어쩌면 유 전 회장은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운영’하는 운영체제와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를 철석같이 믿고 마음을 나눌지 모르지만, 운영체제란 운명적으로 수많은 고객과 동시에 접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 모두의 것인 동시에 전혀 그들의 것이 아닌 것. 이것이 유병언이라는 ‘운영체제’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신엄마’ 관련 정정 및 반론보도문]

본 인터넷신문은 지난 2014년 6월 13일자 「‘신엄마’ 자수, 태권도 선수출신 딸은 여전히 도피중」 등 제목의 기사에서 ‘신엄마’가 유병언 전 회장의 재산을 관리하고 도피를 주도했으며, 청해진해운 김한식 대표의 인사에 관여할 만큼 교단에서 영향력이 크다고 보도했습니다. 또한 ‘신엄마’의 지시로 딸(박 모씨)이 유대균씨의 도피를 도왔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신엄마’는 청해진해운 대표의 인사에 관여한 바 없고, 딸(박 모씨)에게 유대균씨의 도피를 지시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이를 바로잡습니다. 또한 ‘신엄마’는 기독교복음침례회에서 어떤 직책이나 역할을 맡고 있지 않았으며, 유 전 회장의 재산을 관리하거나 도피를 주도하지 않았다고 알려왔습니다.